연로한 어르신을 모시는 직업의 특성상, 주변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여기는 부산. 대구·경북에 비할 바는 아니라 하더라도 지역적인 특성에 연령적인 것까지 합해지다 보니, 나는 어느새 ‘도도한 새누리의 빨간 물결 위를 표류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내가 모시는 어르신은 매주 화요일마다 문학강좌를 열어, 십여명의 수강생에게 문학이론과 창작·감상의 수업을 하신다. 이 ‘화요문학반’의 평균연령 또한 60대 중반이라, 나는 대선기간 동안 내내 귀를 닫고 다닐 셈이었다.
‘부산 사는 늙은이는 다 수구꼴통이다’ 라는 생각. 가만 보면 이것 또한 얼마나 위험한 선입견인가.
이런 내 편견을 여지없이 깨준 것이 바로 이 화요문학반의 송년회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인데, 이것은 거다란형의 블로그(http://www.geodaran.com/2890)에 이미 소개된 바 있으므로 내맘대로 넘어가기로 하고^^
저런 일이 있은 후, 나는 내심 화요일을, 그리고 저 어르신을 기다려 왔던 바, 오늘은 강의 장소를 옮겨 송정 어느 찻집에서 시 낭송회를 하기로 했는데, 승용차 여러 대에 나누어 타고 가게 되었다. 내가 운전해 갈 차에는 70대 영감님 셋, 50대 주부 한 분이 탔다.
(여러 사람의 대화라 글자색으로 구분해야겠다 ㅋ)
“나는 자주 웃고 사는 것이 장수의 비결인줄 알았더니, 황수관 박사 죽는 거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어야겠어.”
동년배의 죽음이 가장 큰 관심사였을까. 화제가 될 만한 뉴스 중 처음 나온 것이 이 얘기였다.
“급성패혈증이라면 사고 난 거나 마찬가진데, 그게 웃는다고 될 일인가.”
“아 그래도 패혈증 균마저 이겨냈다면 과연 웃음이 묘약이로다, 했을 것 아닌가 하하하”
“그나저나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이들 죽는지.”
“조폭 두목 김태촌이도 죽고, 최진실 전 남편 조성민인가 하는 친구도 죽었다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하지....”
“그래도 애들 생각을 해야지, 마음을 굳게 먹지 못하고...”
“조성민은 그렇다 치고, 한진중공업 그 노동자는 정말 안됐어.”
왔다.
“보통 우리는 죽을힘으로 살아라, 그런 말을 하지만 이런 경우엔 그게 아니야. 얼마나 억울했으면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겠어. 사람이 꼭 칼로 찔러야만 살인이 아니라, 이런 게 살인이야. 해고가 살인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냐 말이지.”
“해고뿐이 아니고, 벌금을 158억이나 물렸다잖아요. 일도 못하게 하고 그런 벌금을 물리는 건 죽으라는 소리지 뭐예요?”
저번 송년회때 불참했던 이 50대 주부도 끼어든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참, 이래서 문제라고. 박근혜가 이번에 대통령에 당선이 됐지만, 제대로 된 대통령 노릇을 하려면 지금 당장 한진으로 달려와야 돼. 국민이 억울해서 목숨을 끊었는데 그런 걸 모른 체 하고 무슨 대통합인가?”
쎄다.
“박근혜가 과연 그런 것에 관심이 있을까요? 한진 회장 이롭게 하는 데나 관심이 있을라나.”
오오 여기도.
“박근혜가 좀 귀족적이긴 하지.”
이제껏 한마디도 못하던 우리 영감님이 겨우 입을 연다.
“귀족이라서 그런지 서민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해요. 토론회 안 보셨어요? 대놓고 재벌 편들겠다고 했잖아요. 현대차 정몽구 돈 더 벌어줄 생각은 있을지 몰라도 현대차 노동자들이 왜 이 겨울에 철탑 위에 있는지 박근혜는 절대 모를 걸요?”
몰린다 싶은 영감님이 나름 반격을 시도한다.
“아니 그럼, 문재인은 한진에 왔나?”
“왔지요.”
“당연히 왔지.”
“와서 울고 그랬지.”
왕따는 나쁜 일입니다 어르신들.
그나저나 언제부터 박근혜의 반댓말이 문재인이 되었을까요.
“박근혜가 그런데, 과연, 독재를 할까?”
“하고말고요, 되기 전인 지금부터 벌써 ‘깜깜이 인사’ 라는 말이 있잖아요.”
“불통의 정치를 할까 두렵고, 그리고 이명박도 온전하기는 힘들 테지.”
“이명박이야 뭐, 워낙 저질러 놓은 게 많으니.”
“온전하게 그냥 놔둬서도 안되고.”
“그걸 봐주면 안되죠.”
간만에 의견 통일.
“그러고 보니 이 차에는 문재인 찬양론자들만 모였나보군.”
네, 네, 빨갱이라고 안 하신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문재인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가 국민을 생각해야 한다는 소리지.”
“저는 원래 진보예요.”
“나는 원래 보수주의자인데, 보수도 참 보수라야지 저따위들과 같이 보수 소리 듣기는... 표창원 교수 말 못 들었나? 그 사람 말을 안 빌더라도, 보수라면 부끄러운 줄도 알고, 명예를 중히 여길 줄 알아야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이 분들의 토론은 이 뒤에도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음 주에도 계속될 게다.
이 분들이라 하여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무조건 싫어하고 비난하겠는가. 좀 더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닐까.
노인의 흰 머리와 주름살에서, 경험으로 얻어진 지혜와 관후한 인품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좀 더 잦았으면 좋겠다.
바로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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