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들이 정말로 빨갱이들일까요?”

“지금 그거를 말이라꼬 하나! 이것들이 다 김정일이 사진 걸어놓고 아침마다 절하고, 김일성이 죽었을 때 울고불고 처자빠졌던 놈들이라 안 하나! 이런 뺄개이들은 말카(전부) 이북으로 보내삐야 돼!”

어디선가 자주 듣던 소리였다.

“얼마 전에도 신문에 났잖나 말이다. 이북에서 간첩을 내라 보내가꼬 남한에 진보정당을 만들고, 그거를 키와가 체제를 전복할라칸다드라 안 하든가베. 이것들이요, 대학교에 데모하는 거, 뭐고, 그래 운동권! 운동권하고, 천날만날 파업한다 하는 노조하고, 툭하몬 촛불 들고 기 나오는 것들 하고, 전부 한 통이라요.”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하나.

왜 사회에 관한 모든 것이 북한과 연관되어 가야 하는 걸까.

우린 그저,

먹기 싫은 것을 먹기 싫다고 하고 싶을 뿐이고,


잘못된 일에 대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며,


내 집을, 내 마을을 떠나기 싫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고,


피땀흘려 노동한 데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고, 그저 생존할 권리를 보장받겠다는 것이고,


살인적인 등록금을 좀 내려달라고, 그것도 당신들이 내려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라는 얘기이며,


국민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국가경제를 아주 오랫동안 좌우할 중대한 결정을, 좀 더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해달라고 할 뿐이다.


이런 것들에 북한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선생님은 그러니까,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촛불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진보정당 정치인들, 이 사람들이 모두 빨갱이, 그러니까 공산주의자로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지, 맞아요. 그기 정답이라.”

“하지만 학생운동은 실제로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를 했구요, 노동운동의 경우,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측면이 강하고, 더구나 촛불시위는, 광우병 촛불시위나 반값등록금, FTA반대 같은 경우에 보면,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려는 행위라고 생각되는데, 이게 북한에서 시킨 일이라고 보긴 좀 어렵지 않을까요?”

“그기 순진한 생각이라. 젊은이, 젊은이도 대학을 나왔지요? 그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우째 그래 머리가 안 돌아가노. 이북에서 그런 식으로 사회를 혼란시키가꼬 남한을 잡아묵을라칸다는 거를 이 무식한 할배도 아는데 와 여러분은 몰라요? 촛불이 곧 친북이고 친북이 곧 종북이고 종북은 곧 뺄개이라!”

명쾌하다. 촛불을 들면 빨갱이구나.


“좋습니다. 진보정당 얘기는 거기까지 하구요, 그럼 다른 정당은 왜 부산에서 쉽게 자리 잡지 못할까요? ”

“다른 정당? 다른 정당 무슨 당 말이고?”

“뭐 새누리당, 통합진보당 말고 다른 당이면 민주통합당이겠죠?”

“민주당은 김대중이 당 아이가. 김대중이는 어디 뺄개이 아잉가? 김대중이맨치 큰 뺄개이가 어데 있노? 김대중이가 뺄개이 두목이라요.”

또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김대중 노무현이 뺄개이 아이가. 이북에 햇볕정책인가 지랄인가 한다고 막 안 퍼준나 말이다. 지끔 이북이 로케트며 핵개발이며 하는 돈이 다 어디서 났겠노? 다 김대중이가 준 돈이라카이.”

“그러면,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빨갱이인 이유는, 햇볕정책으로 대북지원을 해준 것 때문인가요? 오직 그것 때문에?”

“아니지, 그 퍼주기 한 거는 뺄개이라카는 증거고, 김대중이는 옛날부터 뺄개이라요. 이북에서 김일성이가 6.25 이전부터 키왔다케. 김대중이가 이북에 가서 정상회담했을 때 이북놈들이 그랬다 안하나, ‘역시 우리 수령님은 앞을 내다 보신다. 우째 김대중이가 대통령 될 줄 알고 미리 키왔노’ 하고 말이다.”

“근거 있는 얘긴가요?”

“그라모! 신문에도 나고 월간 조선에도 났다.”

역시 북조선 소식은 조선일보에서 아는 것이 제격이다.


“그럼 노무현 대통령은요? 노무현 대통령도 빨갱이인가요?”

“히야... 봐라. 노무현이는 아부지도 빨치산이고 장인도 빨치산이다. 그런 거를 모르고 참말로...”

“그럼 본인이 빨갱이라는 증거는요?”

“보면 모르나? 보면 몰라? 그 피가 어디로 가겠노?”

이때 모임에서 엉뚱한 소리를 잘하는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제가 형제가 다 빨갱이인 사람을 아는데요.”

“그기 눈데?”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 그 사람도 빨갱이겠군요?”

“그라모. 한번 빨간 물이 들면 영영 안 진다.”


그 사람이 과연 누굴까.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북한은 못하는 게 없군요, 남한 대통령도 당선시키고 말입니다.”

“아, 간첩들이 곳곳에 숨어가 암약하고 있다꼬.”

“천안함은 당연히 북한 소행이라고 생각하실 거고.”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런 걸 의심하는 사람이 어데 있노?”

“의심스러운 구석은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 국가에서 조사를 그래 정밀하이 해가 발표를 하는데 그거로 안 믿어? 떡~하이 증거가 나와 있잖아 증거가! 정부를 그래 불신해가 되나.”



“하지만 그것을 뒤엎을 만한 증거도 많이 나왔다는데요.”

보수선생은 그 말을 한 사람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봐라, 니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기고? 아니 그라믄 우리 군함이 작전중에 침몰했는데 그기 그라믄 미국 배가 공격했겠나, 중국 배가 공격했겠나, 아니모 우리 아군이 공격했겠나? 이북놈들 밖에 더 있나! 자네는 그라모 천안함이 와 침몰했다고 생각하노?”

“그냥 현재시점의 제 개인적인 견해를 물으신다면, ‘정확히 모른다’입니다만...”

보수선생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꽝 내리쳤다.

“몰라? 몰라? 모른다고? 응? 그 어린 해군 장병들이 참혹하게 희생이 됐는데 모른다는 게 지금 말이라고 하고 앉았나!”

그랬죠. 아까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책임이 있는 상관들은, 전투화에 물 한 방울 안 묻힌 채 잘도 진급을 했더군요.

그 안타까운 일이 사고라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하고, 적에게 공격을 받은 거라면, 경계를 소홀히 하고 패전을 한 데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북한이 착해서 우리 군함을 공격했을 리가 없다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구요, 과연 북한이 그 정도로 어려운 공격을 성공시킬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한미양국의 해군전력이 대거 동원된 합동작전 중에 몰래 잠입해와서, 음향탐지기에도 잡히지 않는 가공할 어뢰를 발사, 한 방에 군함을 격침시키고 몰래 빠져나가는 데 성공할 만한 능력이라면... 과연 어느 나라 해군이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단 말인가.

“이북놈들을 몰라서 그런다. 저놈들은 모든 경제, 과학, 기술 능력이 전부 군사에 집중돼 있다꼬. 충분히 하고도 남지.”

“저번에 농협 전산망 장애도 그럼 북한의 소행인가요?”

“말할 것도 없다.”

“작년에 있었던 대규모 정전도?”

“당연하지.”

정말 북한은 못하는 게 없단 말인가.

더 이상 이 주제로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선생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보래, 그럼 내 자네한테 함 물어보자. 북한을 우째 생각하노?”

“가난한 이웃나라죠.”

“그래? 3대 세습은?”

“말도 안되죠.”

“북한 인권문제는 우째 생각하노?”

“사람이 살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인권문제도 그렇구요.”

“그래? 나는 자네도 뺄개이 사상이 좀 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자네 ‘김정일이 개새끼’ 함 해봐라.”

아아 이말을 여기서 들을 줄이야.

“김정일 개새끼.”

웃음을 참으며 진지하게 대답하자, 보수선생은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앉은 모두에게 그 말을 시켰다. 모두가 대답하고 나자, 누군가가 선생에게 물었다.

“그런데, 박근혜 위원장이나 이명박 대통령은 ‘김정일 개새끼’라고 한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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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위터에서 보수선생을 찾아낸 것은 어떻게 보면 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4·11 총선 이후, 집단멘붕사태에 빠진 트위터 세계에서 누군가가 이런 글을 읽었다고 한다.

사필귀정입니다부산지역총선결과는종북좌파세력을척결하겠다는자유민주주의수호애국시민들의승리입니다체제전복세력이발붙일곳은이제아무데도없읍니다(실제로도 이렇게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플픽의 태극기, 자칭 애국 보수라는 자기소개, 글의 내용, 오래된 맞춤법, 어쩌면 이 사람에게서 우리가 찾는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파뜩 머리를 스쳤다.

처음에 모임 사람들에게 보수선생을 인터뷰하자는 말을 했을 때, 많은 반대에 부딪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아저씨를 왜? 그 사람이 시민의 대표나 보수의 아이콘이라도 되나?”

“조갑제, 김진도 아니고, 변희재, 전원책, 아니 하다못해 강재천도 아니고 굳이 왜 그 아저씨를?”

물론 이 사람은 보수를 대표하는 논객도 아니고, 이 지역의 정치인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지 않은가. 평범한 부산 시민, 그 중에서도 보수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사람, 그들이 왜 줄곧 여당을 지지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멤버들을 하나하나 설득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 어렵사리 보수선생과 연락을 취해, 실제 만난 것은 한 달여가 지난 뒤였다.

부산의 옛 중심가, 남포동 거리에 멤버 중 한 사람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거기서 처음 보수선생을 만났을 때의 첫 인상은, 그냥 ‘할아버지’ 였다.

지하철 역 대합실이나, 동네 약수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노인.

포마드를 바른 흰 머리, 알이 두꺼운 안경, 검버섯이 약간 피어오른 얼굴, 주름져 늘어진 목, 허름한 점퍼와 배까지 올라온 양복바지,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 그 외에 눈에 띄는 것은 유달리 크고 거친 손과 왼손약지에 끼워져 있는 굵은 반지 정도였다.

글머리에 소개했듯이 첫 대화로 족보를 따져본 보수선생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질문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은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1935년생 돼지띠, 올래(올해) 칠십여덜이요.”

“저희가 연로하신 선생님을 수고롭게 이렇게 만나 뵙자고 한 것은, 이번 총선에 대해서 몇 가지 여쭙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트위터에 이러한 글을 올린 적이 있으신지요.”

“있지. 뭐 그기 잘못 됐나?”

“아뇨 아뇨, 저희는 그저 이번 총선 결과를 낳은 부산의 민심, 그 일면을 선생님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럼, 우선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생애에 대해 간략히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한 보수선생의 생애는 대략 이러했다.

보수선생은 1935년, 일제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부터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살림은, 선생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의 아버지가 앓아눕게 되면서 더욱 기울었다고 한다. 갑자기 어려워진 형편에 선생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도 조선공사(지금의 한진중공업)에서 사환으로 일을 시작,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뒤로도 철사공장, 전구공장 등을 돌며 ‘안 해본 고생이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 여기서 보일란가 모르겠는데, 저 영도다리 안 있소? 영도다리캉 내캉 동갑이라요.”

사실, 영도다리는 1934년 11월에 완공되었으니, 선생보다 한 살 위다. 그 정도야 애교 아닌가.

 "그 다리가 억수로 튼튼하다케. 요새 수리하는지 철거하는지 한다꼬 뜯어봤다 카지요? 아직 까딱 없다케. 왜놈들이 놓을 때 땐땐하이 놨거든. 우리가 마 일제 치하에 압박과 설움을 받았지마는, 왜놈들한테 배울 거는 배와야 된다꼬."

 현실속의 영도다리와, 일본이라는 나라는 선생이 알고 있는 것과 제법 많이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생에게 있어서 영도다리는 그저 다리 이상의 무엇이었고,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직도 경외의 대상인 것 같았다. 

가난, 가난, 지독한 가난. 그러나 선생은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 했다. 일하는 틈틈이 한 공부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지역의 사립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 그야말로 주경야독의 나날을 보냈다.

8·15 광복, 6·25 동란이라는 격동기를 같은 시기에 겪었지만, 선생은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질칠 수밖에 없는 청소년기를 지내야 했다.

“휴전하고 얼마 안돼가 군에 입대를 하게 됩니다. 그때는 군대 가면 다 죽는다 그랬어요.”

“그 당시면 휴전이 정말 글자 그대로 전쟁을 잠시 쉬는 것 같은 분위기였겠네요.”

“말이라꼬 하나. 무섭기도 억수로 무서웠지만, 고생도 고생도... 요즘 군대는 군대도 아이라요. 우째됐든동 밥은 안 굶는다 아이가.”

"군인들에게는 그래도 국가에서 보급이 나왔을 텐데도 형편이 많이 어려웠나보네요."

 "어려운 정도가 아니지. 내 얘기를 해보까요? 하루는 내가 마침 배식조가 됐어. 취사반에서 내무반으로 이런 도라무깡(드럼통) 반 짤란 통에다가 내무원들 묵을 밥을 퍼가 둘이서 어깨에 메고 온다꼬. 그래 둘이 지고 오다가 어디 막사 뒤에 안보이는 데 가서 몰래 막 퍼묵었지. 반찬이 어데 있고 숟가락이 어데 있노? 맨손으로 맨밥을 막 퍼묵었다꼬. 그래가 내무반에 가니 밥이 모자랄 거 아이요? 죽도록 맞았지. 그란데, 맞아도 좋더라꼬. 배는 안 고팠으이끼네."

“아무래도 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화 되다 보니...”

“전쟁 중에도 그랬고, 끝나고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보므요, 미군 아이랐으몬 우리는 다 굶어죽었다꼬. 구호물자로 다 묵고 살았는기라. 지끔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를 모르지요? 미국이 우리를 살맀다꼬.”


군복무를 마친 선생은, 지인으로부터 그 성실성을 인정받아 어느 해운회사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30여년, 그야말로 부지런히 일만 하며 살아왔다. 그간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얻고, 작으나마 자기 집도 하나 살 수 있었다.

세월은 흘러,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선생의 행보는 일견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으로 씁쓸한 것이었다. 퇴직금과 적금을 가지고 조그만 자영업을 시작했으나, 보기 좋게 말아먹고 말았다. 이후, 당장의 호구지책과 자식의 학비마련을 위하여 주유소 아르바이트, 아파트 경비 같은 일을 또 해야만 했다.

“그것도 10년 전 일이고, 지끔은 집에서 놉니다.”

옅은 웃음을 띠면서 말을 마친 선생에게 누군가 물었다.

“트위터는 어떻게 하시게 된 겁니까?”

“아, 그거는 우리 손지다테(손자에게) 갤키돌라 캐쓰요.(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내가 쫌 필요한 일이 있어서.”

“필요한 일이요?... 어떤?...”

“그게 머냐카믄...”

보수선생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자네들도 아다시피, 지끔 우리나라에 종북좌파가 얼매나 많노 말이다. 아주 막 드글드글한다꼬. 그란데 내 약수터에 가가 들으이 이거 머 핸드폰 하고 인터넷에 그런 기 더 많다케. 글타케서 우리 대한민국이 완전 뺄개이(빨갱이) 세상이 돼뿟느냐... 하몬 그거는 또 아인기라. 침묵하는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은 옳은 정신머리를 가 있다꼬. 그란데 일부! 일~부 소수 불순분자들이 트위터라든가 인터넷이라든가 이런데서 선동질을 하고 있으이, 우리 같은 사람이 너무 가만 있으모 그놈들이 막 활개를 친다 말이오. 그래서 마 이 진정한 민심을 올바로 전달해주는 목소리를 내자... 마 그래 생각을 했지.”

벌써 느낌이 온다.

“종북좌파....라면 어떤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누가 짐짓 물어보자, 보수선생은 쥐고 온 조선일보 신문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자네들은 신문도 안 읽나? 하기사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신문을 잘 안 읽어요. 천날만날 테레비나 보고, 인터넷만 하재. 자 봐라, 오늘자 조선일보 1면에 뭐라 나와 있는지.”

선생이 펼친 신문 1면에는, 당시 연일 보수언론의 1면 첫머리를 장식하던,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 관한 기사가 역시나 대문짝만하게 나 있었다. 선생은 신문 곳곳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봐라, 통합진보당! 응? 경기동부! 주사파! 여기도 보래, NL! 종북! 이기 이기 다 뺄개이라!”

선생의 눈에는 어느덧 번들번들 광채가 나고 목에는 핏대가 올랐다. 잠시 동안 우리 중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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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하지 않게 보수선생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니, 첫머리부터 막혀 좀체 글머리를 찾기 힘들다. 우선 내가 보수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가 않고, 몇 마디 말로 한 사람의 인생을 - 그것도 나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삶을 살아온 - 규정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자칫 순수한 선의로 쓰인 이 글이 어떤 불순한 정치적인 의도를 띤 것인 마냥 오해 받는 것도 썩 달가운 일은 아닌 지라, 쉽게 쉽게 휘적휘적 글을 써댈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첫째, 이름도 모른다. ‘보수선생’이라는 말은 그의 트위터 프로필에 태극기와 함께 떡하니 박혀 있는 ‘애국보수’라는 말에서 따온 것일 뿐, 그의 본명은 아니다. 교직에 몸을 담거나 남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본 적이 없는 그에게 ‘선생’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도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지만, 그가 나보다 먼저 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그를 ‘선생(先生)’이라 불러서 잘못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의 성(姓)은 확실히 알고 있다. 처음 보수선생을 만난 날, 이런 일이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여기서는 가장 연장이라 대표로 인사를 드립니다. 김현욱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임의 맏형인 현욱이 인사를 건넸다. 보수선생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물었다.

“자네, 김가라고 했나. 본(本)은 어디고?”

“김해(金海)입니다.”

“파(派)는?”

“삼현파(三賢派)입니다.”

“그래? 항렬자가 우째 되지?”

“종(鍾)자 항렬입니다. 족보에는 다른 이름으로 돼 있습니다.”

“내가 용(容)자 항렬이니끼네 내 손주뻘 되는구만.”

이것이 우리가 그와 나눈 첫 대화였다.

말이 나온 김에, 보수선생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부터 얘기해 나가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우리는 부산·경남 지역에 살면서 트위터나 페이스북, 또는 다른 SNS를 통해 만난 사람들로, 우리 지역의 관심사나 정치·사회 일반에 걸친 문제를 서로 이야기하고, 또 그에 관한 여러 정보를 공유하는 소모임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맞이하여, 또다시 부산·경남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의 압승이라는 결과를 보게 되자, 모임 중의 누군가가 별 생각 없이 한 마디를 던졌다.

“왜 이 동네 사람들은 여당을 지지하는 것일까?”

듣고 보니 그랬다. 과연 왜 그런 것일까?

이번 선거만 하더라도, 여당 후보의 자질 문제로 얼마나 시끄러웠나.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혐의로 조사대상이 되어 있는 후보도 있고,

성추행이니 부적절한 관계니 하는 추문으로 제법 시끄러웠던 후보가 있지를 않나,


학위 논문을 대놓고 표절하여 그것으로 교수가 되고, 내친 김에 공천을 받은 후보도 있었고,

후보 유세를 대신하는 TV토론에 나올 자신이 없어 그냥 벌금을 내고 불참해버린 후보도 있었고,

역시 토론에 불참하면서 그 이유를 ‘나는 로봇이니 나가봐야 할 말이 없다’는 어이없는 말을 한 후보도 있었던 데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거나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친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주장을 했던 후보도 있었다.

이게 모두 부산·경남에서만 있었던 일이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모두 당선, 금뱃지를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히 ‘시체가 1번으로 출마해도 당선이 된다’거나,

‘개꼬랑지에 파란 깃발만 달아도 당선이 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이다.

물론, 이번 선거에 그 깃발은 빨간 색이 되긴 했다.

왜 이런 것일까.

부산·경남이라고 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내도록 전통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친여(與)성향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야도(野都)라고 불렸던 적도 있는 곳이다.

부패한 자유당 정권에 맞서 싸워 이 나라 민주주의의 소중하고도 빛나는 첫 승리를 이끌어 낸 4·19 혁명, 그 도화선은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마산의 한 고등학생 김주열의 모습을 담은, 부산일보의 사진 한 장이었다.

짧은 민주화의 봄을 짓밟은 5·16 군사 쿠데타, 지루하도록 길었던 독재의 끝도 사실은 부마항쟁에서 시작되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시위가 시민 계층으로 확산되자,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으며, 10월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킨 후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독재정권의 모순과 부조리는 그들 스스로의 내분을 자초, 결국 10월 26일에 그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산은 이승만 정권에 이어 박정희 정권까지, 두 독재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성지, 항쟁의 땅, 야도(野都) 부산이 왜, 언제부터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야도 맞잖아.”

“응? 무슨 소리..”

“야구(野球) 도시(都市), 야도.”

“....-_-;;;”

아닌 게 아니라 부산은 야구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지역 야구팀 응원에 온 정신이 팔렸다. 그것도 까닭모를 일이긴 하나, 그에 대해서 알아갈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 아니 새누리당을 찍는다고 해서 꼭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나?”

“하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거니..”

“그렇다고 20년 가까이 여당을 지지해 온 것을 진보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 말도 맞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김영삼이 때문이지 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1990년의 삼당합당을 말하는 것일 게다. 3당 합당(三黨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이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과 합당해 통합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을 말한다. 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득표율 2위(민주당 23.8%, 평민당 19.3%)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59석(지역구 46석, 전국구 13석)에 그쳐 원내 3당(평민당 70석)으로 밀려난다. 김영삼 총재는 평화민주당 (1987년) 김대중 총재에 대해 상당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현재의 구도대로 간다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 민정당과 합당하여 여당의 지위를 얻고 자신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차기 대권을 잡는다는 구상을 가졌다.

입장을 정리한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과 비밀리에 합당협상을 펼쳤고, 또한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합당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성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26세의 젊은 나이(아직도 최연소 기록이다)로 국회의원이 되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권과 싸우며 민주화에 지대한 공을 세운 김영삼이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변절, 3당의 야합을 초래하였고, 그것은 PK, 즉 부산경남의 정치적 자산 대부분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김영삼 이후 부산의 민주/진보 진영은 사라져버렸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지도 모른다.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아직 부산의 정치권이나 민심은 김영삼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일까.

김영삼은 ‘보수대연합’, ‘삼당야합’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결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 오랜 꿈을 이룬다. 정권 초기, 군내 사조직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혁신정책으로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잦은 사고와 인명 피해(사실 이 부분은 좀 억울한 면이 있다), 아들 현철씨로 대표되는 측근 비리에 이어, 결정적으로 국가 경제정책의 실패로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초유의 국가부도 상황을 맞게 되자, 지지율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해 버렸다. 최근 어느 조사기관의 ‘역대 대통령 신뢰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영삼 전(前)대통령의 신뢰도는 1%로, 그보다 하위에 있는 대통령은 최규하(0.9%), 노태우(0.5%), 윤보선(0.3%) 뿐이다. 이러한 평가는 PK지역이라고 해서 그리 후하지는 않아 보인다. 이런 것으로는 장기간 일당독재(?)의 분위기를 설명하기 힘들다.

도대체 왜 부산 사람들은 여당을 지지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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