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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시간의 지하철은 다소 붐비지만 그래도 타고 갈 만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했던 오늘 하루를 마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신문을 보는 사람, 졸음을 못 이겨 잠이 든 사람, 벌써 한잔 걸치고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 휴대폰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로 객차 안은 가득 차 있었다.

우리의 보수선생은 옆에 앉은 손자 창훈의 무릎을 토닥거렸다.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조갑제 강연에서 손자를 만나다니! 얼마나 대견한가. 아까 강연장에서 박노인이 부러워하는 얼굴이란! 절로 미소가 머금어지는 선생이었다.

그래, 창훈이 니는 오늘 강연을 우째 들었노?”

따뜻하게 건넨 선생의 물음에 대한 창훈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전 솔직히 좀 실망했어요.”

실망? ?”

조갑제라는 사람, 보수논객으로 이름은 많이 나 있는데, 계속 저런 식으로 강연을 해서는 안 돼요. 저번에 했던 소리나 앵무새처럼 똑같이 되풀이 하고 있고, 보수도 새로운 논리,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고 그래야지 저래서는 안돼요.”

그래? 할아버지는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게 들었는데?”

저는 별로였어요.”

선생의 기분은 반넘어 식어버렸다. 창훈이가 아직 철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 가듯이 나나 조갑제 선생이 이제 한물간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아무튼 기특한 손주와 함께 좋은 강연을 듣고 왔다고, 세대를 뛰어넘은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하는 순수한 기쁨은 퍽 많이 줄어버렸다 


우리를 만나지 못한 동안에 있었던 보수선생의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선생과의 첫 만남이 있은 후, 만남을 주선한 나는 여럿으로부터 핀잔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 토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완고한 영감님 하나 모셔놓고 뭐하는 짓이냐는 거였다. 어차피 서로의 견해나 관점은 평행선을 달리게 되어 있고, 어느 쪽도 상대방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는데 서로 서로 기분만 상할 그런 만남은 해서 뭐하자는 거냐고도 한다.

보수선생과의 두 번째 만남을 추진하는 일은 벌써 거기서부터 그릇되어 있었다. 첫 만남에 10여 명이 넘게 참석했던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딱 세 명으로 줄어버렸다. 나 외의 다른 두 사람을 소개하자면 이러하다.


동욱은 부산의 어느 큰 기업 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는 직장인으로, 정치와 시사를 주로 다루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 제법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파워블로거다. 우리 모임의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관심도 많고 활동량도 많다.

병훈은 사진작가로, 역시 사진과 사회를 다루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 우리의 보수선생이 조갑제의 강연장에서 보았다는 빨갱이 사진사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우리는, 일단 벌인 일이니 마무리 짓자는 뜻으로 보수선생에게 연락하여 다시 만나기로 했다.

보수선생은 흔쾌히 응락했다. 친구 박노인에게 격려받고, 손자 창훈에게 고무되고, 저 유명한 조갑제에게 사상적 무장을 다시 받아서 겁날 것이 없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뭐 아무튼 보수선생으로서는 손해 볼 것도 없었고, 달리 할 일도 없는데 심심한 차에 잘 된 일이었다 


보수선생은 우리를 만나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파뜩 병훈을 돌아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병훈은 카메라를 들던 손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자네 혹시 일전에 부산일보사 강당에 온 적 없나?”

촬영 때문에 자주 갑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예?”

아이, 조갑제라꼬 와 안 있나, 그 사람 강연할 때 혹시 온 적 없나?”

, , 기억 납니다. 그날 갔지요.”

그날 자네는 거 와 왔드노?”

, 누가 그날 행사 사진 촬영을 부탁해서 갔었습니다.”

그런 대화가 오간 후에야 선생은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선생과 헤어진 다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선생의 말을 듣고 옮겨 적은 것이다.

그래, 나는 자네가 조갑제 선생을 우째 할라나 싶어가 간이 옴쫄옴쫄하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의 이런 말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에이, 선생님도 ㅎㅎㅎ, 제가 사진을 업으로 하는 사람인데 프로정신이 있지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라믄 참 다행이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선생과의 두 번째 만남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을 만나뵌 이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통합진보당은 걷잡을 수 없는 내홍에 빠져 이제 거의 분당이 확실해 진 지경에 이르렀고, 민주통합당의 대선후보들도 대략 이제 윤곽이 잡히는 중입니다. 새누리당의 대선후보는 박근혜 의원으로 확정됐구요. 여기 대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째 생각하기는 뭐를 우째 생각해? 순리대로 되고 있지.”

순리대로 된다... 그러면 대선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승리한다고 보시는 거군요?”

당연한 일 아이가! 박근혜가 되고, 박근혜가 돼야 하고, 박근혜가 될 수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이 박근혜 만한 사람이 누가 있노?”

글쎄요 현재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인 민주통합당 내의 후보로는 문재인 후보가 선두를 달리고 있구요, 원외 재야에서는 안철수 원장이 아직도 상당한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습니다만...”

아이고, 택도 없다. 문재인이? 문재인이는 노무현이 쫄로(졸병) 아이가. 비서실장이라 카는 거는 대통령 똥이나 딲아주던 사람이다. 노무현이가 살아가 돌아와도 안될낀데 문재인이 지가 머라고...”

말해두지만, 보수선생 개인의 의견이지 여권, 야권, 우리들 누구의 생각도 아니다.

그라고 안철수는, 안철수가 대통령 되면 이 나라 망하는 기다. 말도 아인 소리는 하지도 마라.”

하지만 여론 조사를 통한 가상 지지율 대결에서는 결코 만만치 않은, 박빙의 승부인데요.”

그거는 그 사람들이 잘 못 생각하는 기라. 내가 볼 때는 우째 생각해도 박근혜가 될 수 밖에 없어요.”

선생은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봐라, 일단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요래 세명이 쪼롬히 나오모 우째 되겠노? 박근혜가 완승이라꼬요. 그거는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어요.”

그야 그렇죠. 그래서 단일화 논의를 하는 거구요.”

단일화? 단일화를 우째 한다 말이고? 만약에 보래, 민주당에서 문재인이가 나온다 치자, 그랬는데 안철수하고 둘이 단일화하자 케가 다시 경선을 했다, 그런데 안철수가 이기뿌따. 그라모 문재인이가 옹야, 니가 해라 카고 순순히 물러날 거 같나? 택도 없다꼬요. 문재인이 지도 욕심이 없다케도 거까지 가모 몬 물러난다꼬요. 그라고 지가 물러난다손 치더라도 즈그 당에서 가마 있겠나! 단일화 안된다!그 반대로 또 보래, 안철수가 뭐 지는 대통령 나올 생각 없다 소리는 하지마는, 속에 흑구리(흑구렁이)가 들앉아가, 지가 우째하든동 대통령 해무글라 카는기라. 그런 놈들이 단일화가 되나? 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화를 이룩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그놈들은 안된다꼬. 보래, 안철수가 양보하고 문재인이가 된다, 그라모 안철수 지지하는 패들이 다 떠나뿐다꼬. 박근혜쪽으로 몰린다꼬. 반대로 문재인이가 양보하고 안철수가 되재? 그라모 민주당하고 친노 패거리들이 우루루 다 투표를 안해뿐다꼬. 잘 될 리가 없어요.”

선생의 희망인지 바램인지 모를 예측이었다. 이제껏 정치판을 봐왔다는 선생의 경험과 상식에 비추어 볼 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박근혜 의원 얘기가 나왔으니 여쭤보겠습니다. 저번 17대 총선에서도 그랬고, 이번 19대에서도 박근혜 효과는 여실히 효력을 발휘했는데요. 박 의원은 이 여세를 대선까지 몰아갈 분위기입니다. 어르신께서는 당연히 박근혜 의원을 지지하실 테구요,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수선생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진지하고 점잖아져 있었다.

, 그거는 머냐카믄요,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지끔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고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지요? 그기 다 누구 은공이라꼬 생각하나 이 말이야. 오직! 오로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새마을 운동, 국토개발 계획, ? 이런 훌륭한 노력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단 말이야. 그라이 지금까지도 국민들이 다 박 대통령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거 아이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라카는 그 공로는 절대로, ~대로 이자뿌믄 안되는기라. 그라이 그 딸인 박근혜 의원을 보고 그 아부지를 생각하면서 지지한다... 마 이래 생각할 수 안 있겠나.”


박정희. 이 이름을 만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역사, 사회, 경제... 대한민국의 현재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할 때 한번쯤은 이 이름을 만나게 된다 

동욱이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선생에게 물었다.

박정희에 대해 아주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높이 평가하다이! 무슨 말로 칭송해도 모자라지! 국부(國父, 局部가 아니니 주의.) 아이가 국부!”

그래요? 그렇다면, 역사상 어떤 인물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 보자... 가까운 역사에는 비할 사람이 없고, 좀 멀리 가면 세종대왕...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너무나 진지한 얼굴이었기에 대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노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입니다만.”

, 박 대통령이 그보다 못할 기 뭐가 있노, 세종대왕은 한글이나 만들었지 뭐 다른 기 있나.”

허허허.

저는 좀 더 비슷한 다른 사람을 알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 누군데?”

박정희처럼 일단 군사쿠데타로 집권을 했..”

쿠데타라이! 혁명이지!”

“..... 그래요, 군사혁명(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르지 못하다니)을 통해 집권을 했고, 철권통치를 통한 장기 독재집권을 했는데, 자원도 산업도 부족해서 극빈국이었던 조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뒤로 가면 쪼매 비슷해지는 거 같네. 그기 누꼬?”


“저 리비아에 있었지요. 무아마르 가다피라고.”

“뭣이 어째?”

선생은 격노했다.

격노하건 말건, 나는 박정희와 아주 닮은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심지어 동상마저 비슷하다.


<"임자, 저 여자 좀 데려와" vs "기쁨조를 날래 대령하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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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보수선생은 부산 지하철 부산진역 7번출구에서 친구 박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평소 ‘5분 늦을 바엔 1시간 일찍 간다.’는 철학을 가진 그였기에이날도 약속시간보다 20분 이상 일찍 도착했다.물론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다.

7번 출구를 나온 선생은고개를 들어 부산일보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오늘 여기서 조갑제의 강연이 있다고 했다이 강연을 소개해준 친구 박노인은 왜 이렇게 늦는 걸까지나 내나 할 일 없는 늙은이가 일찍일찍 안 나오고 말이야선생은 그저 10층짜리 건물과 그 위의 흐린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부산일보>는 대표적인 지방언론으로서, 1946년 창간된역사와 전통이 있는 신문사다. 1949년 916일 김지태(金智泰)가 회사를 인수하여 제2대 사장으로 취임했는데그는 자신이 개국한 부산문화방송을 겸영하다가, 1962년 5월 정수장학회(부일장학회->5·16장학회의 후신)에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의 지분을 넘기고 사장에서 퇴임했다현재 <부산일보>는 석간 신문으로 발행되고 있다.2010년 한국ABC협회에서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지방 일간지 중 발행 부수가 가장 많다고 한다.

마침내 박노인이 도착하자두 노인은 천천히 정문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무슨 계단은 또 이렇게 많단 말인가젊을 때야 별 것 아닌 계단이지만몸이 늙고 병들다 보니 오르내리는 것만 해도 예사 일이 아니다입구로 들어가려 할 때 쯤두 노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 회사에서 업무정지를 받아 사옥 현관에서 집무중인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

한 50이나 먹었을까점잖게 생긴 중년 남자가 부산일보 사옥 현관 앞에 책상을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나중에 들어보니 그 사람은 <부산일보>의 편집국장이었는데부산일보와 정수장학재단과의 관계에 대한 기사를 쓰고 업무정지 명령을 받아 회사에 출근하지 못한 채회사 정문 앞에 앉아 있는 거란다

그 책상 옆에는 박근혜 의원은 대통령 or 정수재단 양자택일하라’, ‘정수장학회의 명실상부한 사회환원을’, ‘박근혜의원은 불법강탈한 정수재단 사회환원에 앞장서라’ 등등의 사인보드들이 세워져 있었다두 노인은 한참 동안 그 글귀들을 읽어보다가 분연히 발걸음을 옮겼다박노인이 나직이 뇌까렸다.

미친 자슥들.”

그래 말이다머한다고 저 지랄이고?”

보수선생이 되받았다두 노인은 휘적휘적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박근혜가 신문사하고 은쟈(이제) 와서 무슨 관련이 있다고 저라노 말이다.”

그라이똑 이래 큰 일 앞두고 있는 사람 곤란하이 만들라꼬... 아이이기 협박하는 거 아이가.”

협박이지봐라 박근혜가 만약 대통령 안 나오모 점마들이 저런 거 떠들겠나그라고대통령 되면?되고 난 뒤에도 저래 까불어치겠나택도 없다.”

박근혜는 손 떼고 완전 물러났다매?”

그래은쟈는 신문사하고 아무 상관 없단다.”

그란데 와 저 지랄이고?”

내사 모르지노조 놈들이 파업하는 거는 즈그 월급 올리달라카는 거 밖에 더 있겠나!”

두 노인은 무책임하게 이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강연장인 대강당이 있는 10층에서 내렸다.

처머이(처음에김지태다테(에게) 뺏들 때 얘기부터 한다메그기 벌써 멫십년 전 일이고?”

케케묵은 얘기지김지태가 누고자네도 기억 안 나나돈도 많기는 많았는갑드라우리 젊을 때 와,그때 자유당인가 거서 정치한다 카믄서 돈 막 안 뿌맀나내 지끔도 외운다 묵고 보자 김지태 찍어주자 임갑수’ 돈이 그치로 많았는갑지.”

돈을 우째가 그래 많이 벌었을꼬.”

뭐 일제시대때 친일도 좀 하고 그랬는갑데.”

근데박정희가 그라모 김지태다테 재산을 뺏들었는강?”

군사혁명 땐데군인들 마음대로 안 했나그래가 요즘 말로 하모 재벌개혁도 좀 됐잖아그때 김지태도 그래가 신문사캉 뭐 제붑 뺏깄는 갑데.”

그래가 넘가 줬으모 그마이지도로 내놓으라 카는강친일 부패인사 재물인데 국고 환수된 셈 치야지.”

친일인사의 재산을 똑같은 어쩌면 그보다 더한 친일인사가 국가권력을 빙자하여 침탈하고국고로 환수된 재산이 개인 재산으로 둔갑하는 신기한 장면이 연속되고 있었지만 두 노인은 이러한 부조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선생 또래의 노인이 몇 보였을 뿐강연장은 다소 한산했다두 노인은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박근혜가 그라모 장학회를 물리받기는 받았는강?”

아 그거야 아부지껀데 아부지 죽고 나모 그라믄 누가 물리받노얼마동안 이사장으로 있었다 카드라.”

참고삼아 말해두지만정수장학회 뿐만 아니라 모든 장학재단은 원칙적으로 비영리 공익 법인이다.개인이 상속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다가언제라카드라뭐 때문에 시끄럽어가 박근혜가 이사장을 물러났다케그라이 은쟈는 정수장학회하고 박근혜는 관계가 없어요.”

그라모 저자슥들은 와 저래쌌노?”

그라이 미친 놈들이지이미 사회 환원된 재산을 우째 또 환원하라꼬 저 지랄로 하는지.”

과연 그럴까.


지끔 이사장은 그라믄 눈데?”

몰라무슨 필립이라카든가팔십... 팔십 몇 살 묵은 어른인데 아조 짱짱한 양반이드라꼬그 양반이 머라켔는가 하모, ‘노조 느그 자꾸 그래 까불므는 신문사 팔아삔다!’ 캤다 안 카나!”

하하하말 잘했네잘했어.”

제발 팔아주세요부산도 시민주주 신문사 한번 가져봅시다.

▲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그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예정된 강연시간이 되었다강연장은 어느새 꽉 들어찼다대부분 선생 또래의 노인들이었는데간혹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선생은 까닭없이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강단에 조갑제 씨가 올라섰다신문지상을 통해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흰 머리에 회색 양복,얇은 금테 안경을 낀 그는강단에 서자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강연을 시작했다 

보수선생과 박노인그리고 청중들은 이내 강연에 빨려들었다아아 명강이었다적어도 그들에게는.조갑제는 유려한 말솜씨와 이해하기 쉬운 어휘알아듣기 쉬운 논리로 한반도의 현재 상태북한의 현실김정은 정권의 미래에 대해 술술술 잘도 풀어내고 있었다.

김정은은 그 애비 김정일처럼 아주 싸이코패스는 아닙니다그러니 체제 안정을 위한 폭정은 좀 할 지 몰라도아주 무모한 도발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 아닌가.

우리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부는 대북정책을 아주 잘하고 있지요북한을 저렇게 고립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제가 예상하건대다음 정부 임기 5년 내에 반드시 북한에서 어떠한 급변상황이 발생할 것입니다그래서 다음 정부가 어떤 정부가 되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느냐친북종북 좌파정부가 들어서느냐에 이 나라 통일이 달려 있습니다만일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대통령이 집권한다면그 대통령은 역사에 통일 대통령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쳐댔다보수선생도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바닥이 터지도록 박수를 마구 쳤다아아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내 생에 통일을 보다니내가 통일을 보고 죽을 수 있다니조갑제는 다시 물을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보통 나라가 잘 되려면 문()과 무()를 고루 갖추어야 한다고들 합니다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잘 되기가 어렵지요우리 역사에서 보면문에 치우쳤던 나라는 조선왕조라고 하겠습니다너무 문약하다 보니 왜란과 호란을 당하는 등치욕적인 역사를 겪었지요반대로 무에 치우쳤던 나라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지요그렇다면 문무를 겸비한 나라는 어떤 나라가 있었을까요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가 문무를 겸비한 나라였습니다불교의 문과 화랑도의 무를 함께 갖추었기에 삼국을 통일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문무를 겸비한 나라는아마 지금의 대한민국일 것입니다대한민국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아주 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었습니다그런 강군을 바탕으로과학기술을 발달시켰고이제 문무를 겸비한 나라가 되었습니다저는 신라 이후에 대한민국이야말로 통일 대업을 이룩할 자격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또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가 일었다이 얼마나 해박하고알기 쉽고간명한 논리인가통일조국이 눈 앞에 다가오는 것 같았다.

▲ 극우논객 조갑제 씨

그런데감격하며 강연을 듣던 보수선생이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정확히 말하면,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다선생은 다급히 옆자리의 박노인에게 속삭였다.

봐라친구야니 저 앞에 카메라 들고 다니는 사람 보이나?”

어데... 대가리 노라이 파마했는 넘 말이가?”

그래뚱뚱하이 안경끼고... 사진 찍고 댕긴다 아이가.”

그기 와사진사 아이가?”

사진산데... 내가 저번에 와 그뺄개이들 만나고 왔다카드라 아이가.”

어제 얘기했지그런데?”

그 자리에 저 친구가 와 있었다.”

머라꼬확실하나?”

하모그때도 점마는 머스마가 와 저래 머리를 기라가(길러서) 빠마를 했노아 지랄 염색까지 했네이래 생각했었거든그래가 기억을 한다.”

그래그라모 금마가 와 왔을꼬?”

혹시 저래 접근해가 조갑제 해코지 할라꼬 온 거 아일까?”

에이.. 설마... 아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이 잘 보고 있자.”

선생은 마른침을 삼켰다어제 박노인과 얘기해 보니 저놈들이 빨갱이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저 녀석은 왜 여기에 왔단 말인가혹시나 저 손에 쥔 카메라로 조갑제 선생을 때리거나 하지는 않을까좋은 강연하러 와서 조갑제 선생이 봉변을 당하지는 않을까그런 위험이 접근해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갑제는 강연을 계속하고 있었다 

독일이 통일을 하고지금 세계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보십시오유럽의 패권을 쥐고 미국 다음가는 강대국이 되었습니다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내의 공업국입니다만약 통일이 된다면어느 학자의 분석으로는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2위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시 우렁차게 박수를 쳤다보수선생도 잠시 불안을 잊고 갈채를 보냈다가난했던 과거.가난했던 나의 과거와 역시나 가난했던 이 나라의 과거를 벗어나세계에 우뚝 설 날이 머지 않았다.벅찬 감격이 눈물이 되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강연은 한시간 반 정도 지나 보수선생의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도 아무런 불상사가 없이 끝났다그 빨갱이 사진사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사람들은 명강연을 펼쳐준 조갑제에게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강연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조갑제와 악수를 한다기념촬영을 한다사인을 받는다 하며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보수선생은 그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하나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니가 여기 우얀 일이고?”

조갑제의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온 그는선생의 손자 창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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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그라믄 그... 뺄개이들하고 만났다 이 말이가?”

지하철 서면역보수선생은 오랜만에 친구인 박노인을 만났다부산도시철도의 1,2호선 환승역인 서면역은부산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과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지하철의 환승역이라는 교통의 이점 때문에선생 같은 노인들의 집결지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다오늘도 길다란 돌벤치에 접이식 바둑판을 끼워놓고 바둑을 두는 노인들이 많았다관전을 하고 있던 선생은 연신 바둑판에 눈길을 주며 박노인의 물음에 답했다.

▲ 두 노인이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있다.(사진은 본문 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완전히 혼(:진짜뺄개이는 아잉그 긑고쪼매 뽈고무리... 한 거 같드라.”

그런 기 어데 있노뺄개이믄 뺄개이고 아이믄 아이지

박노인도 눈앞의 바둑판을 흘깃 보았다검은 뿔테 안경을 낀 흰 머리의 노인과하얀 중절모를 쓴 노인의 대국이었다바둑은 중반 정도였는데백의 우세였다백은 우하귀에서 크게 집을 내어 실리를 챙기고발이 느린 행마로 아주 두텁게 두어가고 있었다흑은 중앙과 좌변을 유리하게 만들어 놓았지만아직 확실한 집이 아닌지라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승패의 관건은 백이 흑의 중앙세력을 얼마나 삭감하느냐에 달려 있었는데내 집도 네 집도 아닌 공배로만 만들어도 이기는 판이기에 백이 우세하다고 볼 수 있었다.

볼 것도 없다, 백이 이깄네.”

박노인이 보수선생에게 귓속말로 얘기했다선생도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친구 니는 그 머시고 손지다테(손자한테) 배완 투위타(트위터)로 해가 그 자슥들을 만났단 말이재?”

총선 끝나고 나이 함 만나자꼬 연락이 왔드라꼬.”

만나가 무슨 말로 하드노?”

처머이는(처음에는우째 살아왔는고 얘기해달라카드마는 트위터는 우째 하게 됐는가 물어보데.그래가내가 늙었지마는 종북좌파 때리잡을라꼬 손지다테 배와가 하게 됐다켔지.”

똑바로 말 잘했네그라이 머라드노?”

종북좌파가 어떤 사람들이냐 카길래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놈미군 물러가라카는 놈노조 파업하는 놈촛불집회 하는 놈들이라켔지.”

와이고마속시원하이 말 잘했네친구 니 대단하네!”

박노인은 박수를 쳤다선생은 자기도 모르게 목에 힘을 주었다우리와 얘기할 때보다 어조가 더 강하고공격적이었지만그 자리에 없었던 박노인은 알 리가 없었고선생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그라이 그놈들이 뭐라카데막 달라들지는 안하드나?”

그기 이상한 기그냥 허허 웃고 말드라꼬벨로 화를 안내드라카이.”

그래와 그렇지?”

몰라그래가 내가 김정일이 개새끼’ 함 해봐라 캤그든그라이 또 순순히 잘 따라해.”

박노인이 무릎을 탁 쳤다.

아하고놈들이 참 교활한 놈들이네우리가 그런걸로 물어볼끼다... 카는 거를 알고 딱 준비를 핸 기다.”

그렇나쪼매도 망설임이 없이 막 웃으믄서 그라든데?”

그라이끼네고놈들이 고도로 훈련을 받은 놈들이다어데 보통 놈들인 중 아나.”

박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놈들이 빨갱이가 아닐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그런 놈들이 순간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눈 딱 감고 김정일 개새끼를 외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보수선생은 새삼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내가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 나왔구나 싶었다. 


그라고그라고는 또 무슨 말을 하드노?”

촛불집회나 학생들 데모하는 거노조 파업하고 인권운동하는 거 이런 기 뺄개이 활동이 아이라케.좀 잘 살아보자 카는 기지 그기 이북놈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카드라꼬.”

하하~! 고놈들 참!”

그래 내가자네들이 그래 인권이 중하다 생각하모 와 탈북자 문제나 북한 인권법은 가마 있노 했드마탈북자는 즈그도 돌리보내모 안된다 카고북한 인권법은 우리나라에서 그런 법 만들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카데.”

고놈들 무슨 꿍꿍이속인 중 모리겠네.”

그래 얘기하다가 밥 사준다케가 밥을 무러 갔거든자갈치 가가 생선회를 사주는데 제붑 잘 대접을 해서 맛있구로 묵으찌.”

뺄개이가 사주는 회 묵으가 어지가이 배불렀겠다.”

뭐 생선이 무슨 죄가 있노.”

하이튼회만 묵고 그라믄 헤어짔나?”

아이지밥 묵으믄서 말 끝에그때 언제고와 안 있나, 6.29 선언 할때 데모 엄청시럽구로 할 때 얘기가 나왔어그래가 그 이야기도 좀 하다가... 그 친구들 말은그때는 다같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느냐...”

그때캉 지금이 같나그라고지금 생각해보모 그때도 뺄개이들이 들어가 선동을 했지 싶으다.”

그랬으까?”

그랬지안 그라고 그랬을 택이 있나.”

여학생 성고문도 하고 물고문 해가 대학생 아도 하나 죽고좀 심하기는 안 심했나.”

보래친구야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데든지 희생자는 있기 돼가 있다아 안할 말로전두환이 한테 덕 본 사람은 좋다칼끼고 피해 본 놈은 싫다칼끼고 안 그렇나그때 당한 사람들은 억울하다케도 그거사 그 사람들 일이지.”

우리의 보수선생과 그 친구 박노인이 전두환정권때에 무슨 덕을 얼마나 보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그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다시금 흔들렸던 생각이 다시 자리를 잡고더욱 굳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라고는 우째 됐노마 같이 데모하던 얘기 하면서 완전 포섭돼뿟는가베?”

아이지그래 될 뻔했는데거서 그때 와 김영삼이하고 김대중이하고 단일화 안돼가 노태우가 됐잖아그 얘기 하다가 김대중이하고 전라도 하와이 얘기가 나왔어그란데 요놈들이 김대중이를 윽수로 떠받드는 거라그래가 내가 딱 정신을 채리고아하요놈들이 뺄개이 근성이 나오는구나싶어가 디기 머라카고 괌(고함)을 지르고 그라고 왔지.”

잘했다잘했다그놈들이 그라이 자네보고 막 달라들기나 해꼬지하지는 안하드나?”

그라지는 안하데택시 태와가 집으로 보내주드라.”

아주 본데 없는 놈들은 아인가베.”

그렇드라.”

하기사 그것도 무슨 꿍수가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아이고하이튼 고생했네.”

박노인이 손에 든 쥘부채로 보수선생을 툭 치며 말했다. 선생도 빙그레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란데요새 젊은 놈들은 와 그래 그런 데에 빠지가 있을꼬?”

보수선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선생의 말대로 예의바르고 제법 똑똑해 보이는 청년들이 왜 그런 불온한 좌경사상에 경도되어 있을까그놈들이 북에서 지령을 받고 내려온 놈들이라 겉모양만 그럴싸 하지 속은 온통 새빨간 빨갱이일까아니면 어딘가에서 세뇌공작을 받고 포섭된 것일까옆에 있던 박노인이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그거는 이런 기다요새 젊은 놈들이 부모들이 쌔가 빠지게 벌어가 대학 보내 놓으이 배가 처불러가,공부는 하기 싫고그라다 보이 취직은 안되고그라이 세상을 탓을 한단 말이다정부가 잘몬해가 이렇다그라이 오만 불평 불만이 많을 거 아이가옛날부터 뺄개이들은 이런 불평분자들한테 접근을 한다꼬요그래가 엉모두 평등하이 잘 묵고 잘 사는 세상이 온다카모 들을 때는 아주 마 솔깃하거든그라믄서 정부가 머 쪼매 실수 하는 거 있으모 그거로 꼬투리를 잡아가꼬 막 개지랄로 떠는 기라그거는 딱 그런 기다더 말할 것도 없지.”

박노인의 명쾌한지극히 논리정연한 대답이었다보수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자네 말 듣고 보이 글타그거 참 큰일이네.”

큰일이고 자시고내 보이 친구 니도 회 한 사라 얻어묵고 좀 갈팡질팡 하는 그 긑은데그라지 말고,내캉 내일 저 쫌 가자.” 
어데뭐 하나?”

저 어데고초량에 부산일보사 안 있나거서 내일 강연 있다카는데 그거나 들으러 가자.”

강연무슨 강연?”

거 왜조갑제라꼬 안 있나옛날에 조선일보 기자 하던 사람그 사람이 내일 부산일보 10층에서 강연회를 한다 카네가가 들으모 재미도 있고아주 유익할끼다마 군소리 말고 내캉 내일 가자.”

조갑제조갑제 유명한 사람 아이가가봐야겠네같이 가자.”

역시 친구를 만나면 반갑고얻는 것이 있다보수선생은 조갑제 같은 유명인사의 강연을 듣게 되어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이때작은 소란이 일어났다아까 박노인과 함께 보던 바둑판의 대국자가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한 수도 안 물리 주는 기 어데 있노!”

못 보고 넘어갔으모 그만이지 뭐한 수도 아니고 몇 수 전에꺼를 물리달라 카믄 우짜는데요?”

아니 완전 이긴 판을 그거 하나로.. 아 참 내.”

박노인과 보수선생은 일제히 바둑판을 내려보았다믿을 수 없게도 필승의 기세였던 백의 대역전패였다처음에 가볍게 흑의 중앙세력을 지워나가던 백의 행마는예상외로 단단한 흑의 저항에 부딪혀,조금씩 조금씩 무리를 거듭하다가급기야 우하귀와의 연결이 끊어져바둑판 전체에 거대한 시체를 남기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둑을 질 수도 있네 그래.”

그라이 말이야바둑 참 알 수 없네.”

세상에 알 수 없는 일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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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우리가 보수선생을 다시 만났을 때,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선생은 얼근히 취한 채 택시 뒷좌석에 푹 기대어 앉았다. 50쯤 되어 보이는 운전사가 선생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기분 좋게 약주 한잔 하셨나보네요.”

“아, 그래요. 오늘 어데 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한테 대접을 잘 받았으요.”

“그렇습니까?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마.. 그렇기는 한데... 그렇네...”

선생은 말꼬리를 흐렸다.


차 안의 라디오에서는 부산 지역방송의 야구중계가 나오고 있었다. 이 지역 야구팀인 롯데의 전경기를 홈-원정 가리지 않고 중계한다는 그 방송이다. 여과 없는 사투리와 편파적인 해설로 지역 주민들, 특히 택시 기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중계방송이었다.

“오늘 야구 우째 됐능교?”

“오늘은 졌습니다. 지금 삼성하고 하는데 7회에 3점 지고 있으이...”

“빙시셰키들 졌네 오늘은.”

“요즘 쪼매 잘하드만 오늘은 그렇네요.”

캐스터와 해설자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도 오늘 경기는 패색이 짙어보였다. 선생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이 탄 차 옆으로 다른 택시가 한 대 스쳐지나갔다. 그 차의 뒷유리에는 ‘100만 택시가족 생존 위협하는 LPG 가격 인상 결사 반대’라는 문구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선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까스값이 또 올랐는가베.”

그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운전사가 바로 튕기듯 대답했다.

“아이고 마 죽겠심니다. 요금은 그대론데 가스값은 오르고 사납금도 같이 오르고, 이래가 우째 살아라카는긴지 모르겠다꼬요.”

“월급은? 기본급 받는 거 있을 거 아이요?”

“세상천지 오만 물가 중에 제일 늦게 오르는 기 월급 아입니까! 그것도 사납금 못 채우면 월급에서 깝니다.”

“참 살기 힘든 세상이네.”

“살기 힘든 세상이지요.”


반복되는 말이지만, 살기 힘든 세상이다.


“저번에 총선 때, 손님들 무슨 말들 안 합디까?”

선생의 말에 운전사는 룸미러로 흘끔 선생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무슨 말요?”

“뭐 살기 힘들다는 말이나, 이번에는 누구 찍어야 된다는 말이나...”

“살기 힘든 거야 다 매한가지지요. 이때까지 한나라당 계속 찍어줐는데 무슨 소용이 있더나 이런 말도 듣기는 들었습니더.”

“하기사, 부산이 점점 발전되는 거 같지도 않고...”

“발전은요, 완전 망했지요. 인구도 줄고 돈도 다 빠지 나가고.”

“그라믄, 그 사람들은 민주당 찍는다 카든가베?”

“그기 또 그런 거는 아인 기... 그래도 한나라당 찍어야 안되겠나 캅디다.”

“하기사 민주당 찍어봐야 별 수 있겠나.”

“그렇지요 다 똑같은 놈들인데.”

“그래, 다 똑같은 놈들이지.”

보수선생은 다시 창밖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차는 부둣길을 달리고 있었다. 젊은 날 그가 땀 흘려 일하며 오갔던 북항은 대교 공사로 폐쇄되어 불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선생은 다시 뇌까렸다.

“... 다 똑같은 놈들이지.”


 집으로 돌아오니, 선생을 맞이하는 것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내뿐이었다.

“뭐, 젊은 사람들 만나서 인터부한다카드만 술 묵고 왔능교?”

“마치고 한잔 했다.”

“인터부고 머고 고마 술 무러 갔구만.”

“마치고 무그따니까.”

“아이고, 내가 평생을 그노무 술 때문에 내가 몬살겠다. 나이가 칠십 넘어가 팔십이 다돼가모 좀 절주를 해가 안 묵으믄 안 좋나. 지금 청춘인 줄 아요, 그래 천날만날 술로 묵고 다니구로?”

“어허! 남자가 밖에 나가서 술도 좀 묵고 들어올 수 있는기지 뭐 말이 많아. 애비랑 에미는?”

“애비는 오늘 물량이 많아가 늦게 온다켔고, 에미는 사무실에 회식이라 캅디다.”

“손지들은?”

“민지는 안즉 안 들왔고, 창훈이는 지 방에서 공부하요.”

“가스나가 일찍 일찍 안 다니고 어디 싸돌아댕기노. 요즘 세상이 어떻는데.”

선생은 계단을 올라가 손자의 방으로 갔다. 이제 고1이 된 손자 창훈은 요즘 선생의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창훈아, 공부하나? 할아부지 왔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손자 창훈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이 들어오기 전에 뭔가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선생이 방으로 들어오자 창훈은 슬며시 컴퓨터 책상 앞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옆으로 치웠다.

“방이 와 이래 덥노? 안 덥나 니는?”

“괜찮아요, 할아버지.”

“공부는 잘 되나?”

“그냥 그렇지요.”

“고등학교 들어가니까 중학교 때하고 다르재? 더 열심히 해야될 끼다.”

“알아요, 할아버지.”

“보자, 지금 무슨 공부하고 있었노? 영어공부했나? 컴퓨터 하는 거 같던데.”

“아, 잠깐 제가 운영하는 카페 게시판 관리하고 있었어요.”

“카페? 무슨 카페? 카페가 뭐라 켓니라?”

“아이 참, 전에 말씀 드렸잖아요 종북 좌빨 척결하는 청소년 카페라고, 할아버지도 보셨으면서.”

“아, 그거. 니 그란데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안하기로 했잖아.”

“그전만큼 거기 매달리는 건 아니고 기본적인 관리만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러면 뭐...”

공부를 안하더라도 틈틈이 이런 걸 하는건 괜찮겠지. 게임이나 야동에 빠져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아니 불온한 사상에 물들어 학생이 촛불집회나 드나드는 것에 견주어보아도 손자의 여가선용은 참으로 알차고 훌륭하지 않은가. 선생은 절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선생의 손자인 창훈은 중학교 때부터 무슨 일베인가 디시인가 하는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정치와 사회에 관심을 가져왔다. 급기야는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어 운영한다고 하더니 뭐 회원 천명을 거느린 카페지기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선생에게 트위터를 가르쳐 준 것도 창훈이었다.

창훈의 활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전에는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간첩을 잡았다는 게 아닌가. 박 무슨 근인가 하는 이름을 가진 그 ‘간첩’은 트위터 상에 북한의 선전사이트 ‘우리민족끼리’의 글을 리트윗해서 북한 체제를 고무찬양했고, 창훈과 다른 사람 몇 명이 그를 고발,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수감시켰다고 한다. 창훈은 국정원에서 나온 직원에게 감사의 표시로 국정원 마크가 찍힌 시계를 선물로 받았고, 창훈이 그 시계를 사진으로 찍어 카페에 올리자,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과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절대시계의 위용.jpg>


이에 고무된 창훈은, 언젠가 식탁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대학 가는 문제가 해결됐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굳이 죽어라 공부하지 않아도, 요즘은 입학사정관 제도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전국에 저만큼 정치,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청소년은 없을 거예요. 있다고 해도 좌빨 쪽에나 있지 애국 보수 쪽에는 없거든요. 그걸 어필하면 충분히 대학 갈 수 있어요.”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이제껏 잠자코 듣고 있던 선생의 아들, 창훈의 아버지인 영환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쓸데 없는 소리가 아니고...”

“시끄럽다.”

금세 풀이 죽은 창훈이 보기 안타까와 선생이 거들었다.

“그래, 쓸데없는 소리라이, 지가 그래 열심히 하는데 와 그래샀노.”

“아부지도 괜히 아 버릇 나빠지구로 너무 오냐오냐 하지 마이소.”

평소 말수가 적고 차분한 아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선생도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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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에 취한 것은 선생 뿐만이 아니었다. 연거푸 들이킨 술잔에 우리들의 얼굴과 머리도 달아올랐다.

 “무슨 이제는 되지도 않는 걸로 다 트집이십니까, 돈 먹여서 노벨상 받을 수 있으면 이건희 회장은 한 백 개는 받게요?”

 “뭐라? 말이면 단 줄 아나! 귀때기 새파란 기 어데서 눈을 똑 불시고!(어디서 눈을 딱 부릅뜨고)”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다. 좀 덜 취하고 정신 멀쩡한 사람들이 말려야 했다. 논리적으로 불리할 때 나이 얘기를 꺼내는 선생이야 그렇다 치고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젊은 사람이 연장자에게 술 먹고 대드는 모습은 썩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한참을 어르고, 달래고, 무마하고, 빌고 한 끝에야 모두들 흥분을 가라앉혔다. 선생은 혼잣말인지 넋두리인지 모를 것을 중얼거렸다.

 “자네들이 뭘 아노. 아무꺼또 모린다. 보릿고개를 아나, 6.25를 아나, 몰라요, 모른다꼬요. 얼매나 고생을 해가... 엉? ... 새마을 운동... 박대통령... 경제를 이마이 발전시키가... 어데 그런... 택도 없는... 뺄개이... ”

 두엇이 또 푹푹 한숨을 내쉬었지만 눈짓으로 말렸다. 과연 이 이야기를 계속 끌어나갈 수 있을까.

 “응? 우째가 발전시킨 나란데 말이다... 그거를 모르고...”

 “그렇게 발전시킨 나라를 그럼 김대중이 집권해서 말아먹기라도 했나요?”

 “말아묵었지! 이북에 막 다 갖다 퍼주가꼬, 엉? 핵무기 만들으라꼬 막 퍼주가 말아묵으찌!”

 “그 정도 보내줘서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22조 들인 4대강 사업해서는 완전 거덜났겠군요?”

 “아 그 돈이야 누가 해묵든지 우리나라 안에 있지 어디 가나! 좀 해묵으믄 어떻노!”

 “예? 뭐라구요?”

 “내 말이 틀맀나! 대한민국 돈 몬 묵는 놈이 바보지! 아 누가 묵든지 국내에 있으면 되는 거 아이가!”

 이 말을 듣고 다들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글쎄요, 그 해먹은 돈이 국내에 과연 있을지, 싱가폴에 있을지 모르겠군요.”

<눈치챘구나!>

 

 이것도 보수언론이나 논객, 인터넷 공간의 담론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주제일 것이다.

 ‘국민의 정부, 그러니까 김대중 집권 시부터 시작된 일방적이고 막대한 금액의 대북 퍼주기로 북한이 핵개발을 감행하고 체제를 유지하여 통일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심각한 오류투성이인 문장이다.

 

 하나하나 뜯어보자. 첫 번째로 대북지원은 최초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집권 3년차인 1995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정부여당이었던 때에, 북한 주민의 식량 지원 등 인도적인 차원에서 시작된 대북지원은, 임기말까지의 약 2년 반 동안, 경수로건설 지원금을 포함하면 약 4조원에 달하는 현금과 물품으로 구성되었다. 시작을 한 것도 이 문민정부 때였고, 액수도 가장 많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지원액이 3조원 남짓인 것을 생각해보면, 단기간에 많은 액수를 지원해준 것이다.

 

 다음, 대북지원은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무상지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북지원은 크게 정부차원의 무상지원과 식량 차관, 그리고 민간 지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식량 차관은 제6공화국 당시 북방외교를 통해 러시아에 차관을 제공하고 무기 등의 물자로 상환을 받은 바로 그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번 이명박 정부때에 첫 상환기일이 도래하였으나, 남북관계의 급속한 악화로 지원과 상환 모두가 무기한 연기(라고 쓰고 무산이라고 읽는다)되었다. 정부의 무상지원과 민간기업의 지원도 그저 생각하듯이 김정일의 계좌에 현금을 쏘아^^주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 관광에 따른 관광수익금과 개성공단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된 금액이 대부분이다. 참고로, 개성공단 지원금을 가장 많이 보낸 정부는, 놀랍게도 이명박 정부이다. 이명박 정부 때 총 8,696만달러를 송금해 4,131만달러를 송금한 노무현 정부 때보다 2배 이상 지급했다고 한다.

<돈봉투로 직접 주려고 했던 사람들은 누굴까?>

 

 자, 그러면 주지 않아도 될 돈을 주어 핵개발을 도운 건 사실 아니냐고? 로켓이며 핵이며 누가 준 돈으로 개발했냐고?

 일본과 미국이 준 돈으로 개발했다.... 고 하면 놀라려나?

 1995년부터 2002년까지, 가장 대북지원이 활발했을 무렵의 지원규모를 보면, 우리 정부쪽의 지원액은 5억 달러, 같은 기간에 일본은 9억, 미국은 6억2천만 달러를 지원했다. 북한이 무슨 돈으로 뭘 했다면 이 돈이 더 많지 않나?

 게다가 우리 정부 측 지원액의 상당부분이 식량 차관이라 쌀이나 비료 등의 현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아니 북한에서도 김정일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모래로 쌀을 만들었다는 개뻥은 치지만, 쌀로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 쌀마저도 군량미로 전용된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전량 햇반으로 바꿔야 한다고 설치던 걸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맴돈다. 북한군은 다른 물자 없이 밥심으로만 전투를 하나보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대한 야욕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1994년에 벌써, 보수언론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보도한다. 미국 CIA 1994년 의회 보고서에도 "북한은 1992년 이전에 핵개발을 끝냈다"라고 돼있다.

 주사파의 창시자이자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공투사^^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말도 그와 일치한다. 그는 "북한은 핵무기를 쓰고 남을 만큼 만들어뒀다"며 핵실험 준비가 93년 당시에 완료됐음을 시사한 적이 있다. 황 전 비서는 북핵문제와 관련해 "1996년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지하에서 핵실험을 다 할 정도로 이미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가 상당수 만들어져 있다고 대답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정부의 대북지원과 북한 핵 개발은 시기와 성격, 규모에서 모두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보수선생의 귀에 이런 말은 잘 들어가지 않는다. 맨 정신으로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인데다 술기운마저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또 금세 다른 얘기를 하신다.

 “김대중이가 대통령 되고 호남이 얼마나 발전했는줄 아나? 길도 엄청시릅게 닦아놓고 공장이 막 들어서가 밤새도록 공장 짓는다고 시끄럽다케.”

 전라도에 태어나서 여태껏 한 번도 가 보신 적이 없다는 보수선생의 말씀이다. 우리가 별 대꾸가 없으니 선생은 또 다른 얘기를 꺼냈다.

 

 “요즘 와 데모를 안하는 줄 아나? 옛날에는요, 김대중이가 데모하는 놈들한테 돈을 대줬다케. 그란데 지 집권하고는 안 줬을 끼 뻔하고, 지 죽고 난 다음에는 줄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데모를 안하는기라.”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린가.

 “봐라. 그 전에까지 얼매나 데모를 많이 했노 말이다. 그랬는데 김대중이가 정권 잡고는 하나도 안했잖아? 그기 바로 데모하는 놈들이 뺄개이 사주를 받고 했다는 증거라!”

 이 말에 모두들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특히나 더 어이없어 한 사람이 우리 중에 하나 있었다.

 

 정윤은 대연동의 어느 대학교 앞에서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는 30대 초반의 젊은이로, 군 복무를 의무경찰로 마쳤다. 검도를 잘한다는 죄^^로 기동대로 차출되어 2002년부터 2004년까지, 2년여의 복무기간 내도록 전국 곳곳의 시위진압에 동원되었던 그는, 지금 보수선생의 이 같은 말을 듣자 할 말을 잊은 채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가 복무 중 진압했어야 하는 시위는, 굵직한 것만 해도 미선-효순이 추모 촛불집회, 그에 이은 SOFA 개정 촉구 집회,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유치 반대 집회, 화물연대 파업 집회, 전국농민대회... 특히, 화물연대의 파업은 이때 처음 시작되었고, 2003년의 전국농민대회는, 직전에 멕시코에서 WTO 회의를 저지하기 위해 자결한 이경해 열사의 49재에 맞춰져 있어, 역대 최대의 규모였다. 전쟁터 같은 시위현장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근근히 버텨왔는데 김대중 정부때는 시위가 없었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평소 온화하고 얌전한 정윤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검은 뿔테 안경 안의 눈이 이상하게 빛나는 것을 본 나는, 오늘의 모임을 이것으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6월 항쟁을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느꼈던 것도 잠시, 선생과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그 격차는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벌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선생님,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저희도 다들 들어가 봐야 하고, 선생님도 댁으로 가셔야지요.”

 “와? 한 잔 더 안 하고?”

 “예,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그래?.... 뭐, 내야말로 대접 잘 받고 고맙다.”

 “오늘 못 다한 얘기는 다음에 또 듣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지요.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택시를 잡아, 아쉬운 빛이 역력한 선생을 태워 보내고, 우리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오늘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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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나 흘렀다. 그리고, 선생과 우리들의 취기도 꽤 올랐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당시 야권 단일화가 깨졌고, 그런 일들을 볼 때, 전라도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 뭐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라고.”

“당연히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은 안 갖고 계시고.”

“좋은 감정이 어데 있노! 나는 한번도 김대중이를 대통령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같은 김해김씨 집안 사람끼리?”

이 한마디가 선생을 폭발시켰다.

“김대중이가 우째 김해김씨고! 김대중이는 김씨가 아이라! 제갈씬지 윤씬지 씨도 모를 놈이라! 함부리 내 앞에서 그런 말 하지마라!”

마치 발악하는 듯한 선생의 노호(怒號)에 우리 일행 뿐 아니라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선생을 쳐다보았다.


<한국의 흔한 김해김씨들.jpg>


선생의 안경 속 눈은 세모꼴로 일그러져 있었고, 단정하게 빗었던 머리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으며, 술이 오른 얼굴과 목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일부러 꾹 앙다문 입가에는 희게 거품자국이 배어나왔다. 선생은 눈이라도 찌를 듯이 손가락질을 해댔다.

“니! 니는 김대중이 좋아하나!”

“...뭐, 저는 그냥 그렇습니다.”

“니는! 니는 어떻노!”

“저는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뭐어? 존경? 존경같은 소리하고 처자빠졌네. 김대중이가 어떤 놈인데! 김대중이가 뭔데!”

“...독재와 싸운 민주화 투사고, 노벨평화상 받은 인권운동가이며, 남북긴장관계와 국가부도사태를 수습한 정치가...”

“웃기지 마라! 김대중이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뺄개이야!”

웃긴다면서 선생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하였을까.


부산·경남이 지금처럼 보수화 된 데에는, 반공이념이나 일반적인 지역감정 외에도, 특히 이 ‘김대중’이라는 인물에 대한 반감도 제법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호남지역의 김대중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역시 가끔 웃음거리가 되긴 하지만, 영남의 김대중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혐오감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처럼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데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반면, 원인이 없는 결과도 없고, 이유 없는 현상도 없지 않겠나.

도대체, 그래, 김대중이 뭐길래 이토록 싫어한단 말인가.


그 답을 저렇게 벌개진 얼굴로 흥분한 보수선생에게서 들을 수 있을까.

이후의 화제가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정신 이상한 여자 널뛰기 하는 듯’^^ 한 것은, 전적으로 보수선생의 탓이지 우리 탓이 아니다. 아니, 따지자면 술 탓인가.

“김대중이.. 엉?... %$#%$.... 노벨상...&*$%@... 노오벨상...&^%@^.... 와이로... $!$^&$%... 돈 처묵...”

중간중간의 특수문자는, 욕설에 대한 필터링이 아니라, 정말 못 알아듣는 비분절음이라서 이렇게 표기한 거다. 물론, 내용이 욕설이었을 거라고 생각은 한다. 술과 지나친 흥분은 선생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선생은 지금 2000년도에 김대중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실을 놓고 얘기하는 것 같다.

잘 알려진 대로, 노벨 평화상은 스웨덴의 발명가 노벨의 유언에 따라 인류의 문명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섯 부문의 노벨상 중 하나로, 국가간의 우호, 군비 감축, 평화 교섭 등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이나 단체에게 주어진다. 수상식은 다른 부문과는 달리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국회에서 열린다. 김대중은 민주화와 인권신장, 햇볕정책과 남북정상 회담을 통한 한반도 화해, 평화 구축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도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노벨상의 권위나 공신력에 관해서 여기서 따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수많은 학자와 활동가들에게 불멸의 명예를 주었지만, 모든 일이 그렇지만 그에 따른 뒷말도 있어왔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나 수상자가 우리나라 사람, 그것도 대통령이고, 최초이자 어쩌면 유일의 수상이 될 수도 있는데다, 그 개인은 물론 국가의 영예이기도 한데도, 모든 사람들이 축하하거나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수선생이 저렇게 대놓고 욕질을 하듯 제법 상당수의 사람들이(그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수상 자체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지경이 되고 보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선생을 비롯하여, 수상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막대한 자금의 뇌물을 갖다 바친 로비를 했고, 그 결과로 상을 받게 되었다.” 이 주장의 근거는, 막연한 ‘카더라’(ex: 김대중이가 돈 멕이고 노벨상 탔다 카더라)와 ‘그럴 리가 없다’(ex: 김대중이가 노벨상을 받을 리가 있나)를 빼고 나면, 아마 지금은 미국 망명중인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의 폭로가 유일할 것이다. 김영삼정부의 ‘미림팀’ 정보와, 이명박 정부의 메릴린치 투자 관련 폭로 등 3정부에 걸친 내부고발을 한 이 인물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며 정치적인 망명 상태인데, 폭로된 사안들의 중대성에 비하면, 그가 내놓는 근거는 거의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


어쨌거나 노벨상 수상 당시 국내의 반 김대중 정서를 가진 사람들 - 영남, 한나라당, 보수언론 - 의 비아냥과 흠집내기는 자못 대단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얘기도 들려왔다.


노벨위원회 군나르 베르게 위원장이 반국가적 반이성적 수구보수 패권세력들의 이러한 행태를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한국'이라면서 "나는 한국인에게 노벨상을 주지 말라고 한국인들로 부터 로비 시도를 받았다.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고 로비를 하려고 하면 더 엄정하게 심사한다. 한국인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고 말하였겠는가. 그는 또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편지 수천 통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내가 노벨 위원회에 들어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나라에서 반대 편지가 대량 전달된 것이 특정지역에서 날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지역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노벨상 중에서도 가장 노벨의 염원을 담고 있는 평화상이 로비를 받아낼 수 있는 상이라면 과연 세계 제일의 평화상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편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노벨상은 로비를 통해 수상할 수 있는 상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상이 얼마나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더더욱 그 가치가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 왜 다수의 한국인들이 김대중의 위대함과 그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에 감명 받지 못하는지 그이유가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며 통탄을 금치 못하였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바 있는 현 동티모르의 오르타 대통령도 월간 조선기자가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으려고 로비를 한 게 아니냐"며 집요하게 묻자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 김대중은 가장 유명한 독재자에 목숨 걸고 항거한 사람이었다. 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지도자를 비난하는지 묻고 싶다. 질투 때문인가"라고 대답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군나르 베르게 노벨 위원회 위원장, 오르타 동티모르 대통령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 지도자와 유명인들은 노벨상의 권위를 인정하고 수상을 자랑스러워하기는커녕 노벨상의 권위를 훼손하는 한국의 수구보수 패권 집단과 지역민의 행태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자, 이 이야기는 ‘김대중 노벨상 로비’를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기사다. 주로 모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 그 출처가 명시되어 있는 기사인데, 트위터나 블로그 글 등으로 확대 재생산 되었다. 사람들은 이 기사를 보고 분개하면서, 글에 나와 있는 대로 ‘개탄’하였다. 경사스러운 일에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지는 못할 망정, ‘남 잘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식으로, 되지도 않은 이유로 헐뜯고 비난하는 ‘그들’의 작태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얘기는 근거 없는 얘기다.

‘군나르 베르게’라는 사람은 분명 실존 인물이며, 노벨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동티모르의 오르타는, 수상 당시 장관이었고 지금은 대통령이며, 월간 조선과 인터뷰를 한 일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어떠한 신뢰할 만한 언론기관의 기사에도, 저런 발언은 실려 있지 않다.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기 위해 쇼핑백에 돈을 담아 돌렸다’ 는 말 만큼이나 이 이야기도 근거가 희박한 것이다. ‘했을 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실제로 한 얘기’는 아니다.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까지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저들’이 악랄하고 악의적인 비난과 중상모략을 퍼부은 것은 사실이니까. ‘같은 식으로 당해보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

괴물과 싸우다가 같이 괴물이 되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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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양과 유배에 따른 한풀이’ 이론은 더 말이 안된다. 이것도 ‘유배문화론’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데, 일단 뭐 조선조때의 귀양/유배지 통계부터 보는 것이 순서 아닐까? 통계에 따르면 『조선인명록』에 실린 사람 중 조선시대 340년간에 귀양살이를 한 사람 수는 700명인데 그 중 4분의 1인 178명이 전남에, 2명이 전북에서 유배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오오 꽤 많은 수 아니냐고?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이 삼수, 갑산과 같은 함경도, 평안도 국경지역으로 갔고, 거제도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도 만만찮은 숫자를 차지한다. 이곳들이 유배지로 쓰인 것은 심산유곡과 절해고도이기 때문이다. 요는, ‘한양에서 멀어지는’ 것이 중요할 뿐, 동이든 서든 남이든 북이든 그리 썩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거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일단 유배되면 한 곳에 계속 주구장창 머무는 것이 아니라, 평균 1년이 채 못 되어 이리 저리 옮겨가는 바람에 무슨 지역민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후손이 뿌리를 내리고 이럴 계제가 아니었다. 유배문화론 역시 어불성설이다.


6.25 때 참전율 탈영율 어쩌고 하는 개소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전쟁 당시, 사단 편제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단이라 할 한국군 1사단의 주력이 호남 출신들이었다는 얘기가, 이것 참, 이런 데서 이름 들먹거리기 싫은데,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그래, 쏴 주마.>


‘하와이 필화 사건’은, ‘황색잡지 축에도 못 끼는 찌라시’에 시인인지 소설가인지 모를 어느 글쟁이가 배설물마냥 퍼질러 놓은 것일 뿐, 이 역시 지역주의의 어떠한 근거나 유래는 되지 못한다. 대표시집으로 이승만 찬가집 <우남찬가>를 내세운 작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편견, 근거를 알 수 없는 속설 따위를 나열해 놓은 저런 따위에 ‘글월 문(文)’자를 넣는 것도 아깝다.


<주의 : 읽고 나서 각자의 방식으로 안구를 정화하시오.>


그러고 나면, 이제 남는 것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의 일이다.

당시, ‘40대 기수론’을 제창하여 세대교체 바람을 몰고 온 김영삼을 당내 경선에서 물리치고 단일 야당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김대중은, 3선개헌을 통해 세 번째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영남 출신의 박정희와 호남 출신의 김대중이 격돌하는 대선의 특성상 선거 운동 과정에서 지역감정 선동이 극심했는데, 먼저, 김대중은 호남 소외론을 내세워 당시 상황적으로 발전이 더디던 호남 지역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선동 등에 의하여 영남의 ‘지역감정적 투표 행태’가 더욱 극심해졌다. 대선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는 언급을 하였다. 이효상은 박정희 지지 찬조연설에서 "쌀밥에서 뉘가 섞이듯이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중에서 박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이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또한 박정희 측에서는 "신라 대통령론"과 선거 3일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영남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결과로도 나타났다.


“그거는 헛말이 아이다. 전라도에 가모요, 롯데과자는 팔지도 않는다고. 부산 남바 붙은 차는 기름도 안 여 준다케. 전라도 하와이 고놈들이요, 지독한 놈들이라요.”

“선생님께서 전라도에 가셔서 겪으신 일인가요?”

“아이, 내사 전라도는 가 본 일이 없지마는 말이다..”

“예...”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할 일인가 보다.


 이러한 지역주의의 흐름은, 이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한, 6월 항쟁 직후인 1987년의 제13대 대통령선거에도 이어졌다.

이 선거의 후보는 집권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와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외에 4명의 군소후보(이 중 백기완 선생 지못미ㅠㅠ) 등 8명이었는데, 단연 관심은 첫 네명, 즉 이른바 ‘1노3김’에 쏠렸다.


군복을 양복으로 갈아입었을 뿐, 전두환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인생을 살아온 주제에 “이제는 안정입니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자칭 ‘보통사람’ 노태우.


그 노태우와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에 의해 축출된, 그래서 무슨 낯짝으로 출마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궁금할 따름인, 유신세력의 잔당 김종필.


오랜 세월 동안 그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함께 싸워 왔으며, 그들을 끝장낼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보수선생의 표현대로 ‘차려준 밥상도 못먹고 뒤엎은 쪼다같은 새끼들’ 김대중과 김영삼.


이들에게는 모두 ‘비빌 언덕’, ‘믿는 구석’인 자신들의 근거지역이 있었다.

노태우는 경북·대구를, 김영삼은 부산·경남을, 김대중은 호남, 김종필은 충청을 중심으로 표를 모아 갔다. 당연히, 지역대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와 김영삼이 호남유세에서 달걀과 돌 세례를 받고 유세를 중단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등 선거는 사상 유례없이 지역대결로 치달았다. 플라스틱 방패로 날아드는 계란을 막아내던 노태우의 경호원들과, 빈볼 아닌 빈스톤^^;;;에 비명을 지르던 김영삼의 모습은 내 기억에도 선명하다.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김영삼에 대한 반응은 그렇다 치고, 노태우는.... 글쎄다. 80년 광주는 고작 7년전의 일이었다. 김대중이라고 해서 영남 유세를 무사히 마칠 리 만무했다. 각 언론, 특히 방송사는 그런 장면을 주요뉴스에 올려 신나게 틀어댔고, 그 결과로 각 후보의 지지자들,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 간에 생긴 증오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이런 걸 준비해 간 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얘기겠지?>


“그라고 보이 자네는 고향이 어데고?”

“아, 저는 부산 토박이입니다.”

“부모님은?” “부모님도 마찬가지죠. 아버지는 동래에서 태어나셨고, 어머니는 저기 어디냐... 재송동...”

“그래, 나는 혹시 자네가 전라도 사람인가 싶어서 물어봤다. 여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있는지는 몰라도, 하이튼 전라도 사람들은 상종을 하모 안돼요. 내가 우리 아들다테도, 여자를 알아가 결혼을 할 때, 다른 거는 다 괜찮은데 전라도 여자는 안된다켔다카이.”

예, 예, 그러시겠죠.

“그것들은요, 또 즈그끼리는 윽수로 똘똘 뭉치요. 그런 말 못 들었나, 우리 나라에서 절대 건드리면 안되는 조직이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 또 하나는 뭐라카드라... 이자뿐는데 하이튼 그렇다 안 카드나. 넘들다테는 배신해도요, 즈그끼리는 단결하는 기 무섭다카이.”

“그런가요?”

“그라모! 자네들은 뭐 부산에 한나라당 투표율이 몇프로니 어쩌니 하지마는, 광주는 어떻노? 거는 99프로 아이가? 와 그런 거는 말로 안하노 말이다. 그라고, 가들이 단합을 잘한다카는 거는 야구만 봐도 안다.”

“야구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아 옛날에 해태 기억 안 나나? 야구가 단체운동 아이가. 전라도놈들이 그런 거는 사실 무섭게 잘한다꼬. 니나 내나 부산놈들 맨추로 허리벙~하이 안 그렇고.”

하긴, 전성기의 해태타이거즈는 정말 무서운 팀이었다.

술을 마신 선생의 머리와 혀는 약간씩 탈선하고 있었다.

“유니폼도 참말로 뭐같이 뻘~거이 해가꼬... 누가 뺄개이 아이라 칼까봐 말이다.”

그러게.

이 빨갱이 새끼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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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87년의 대선은 야권에서 볼 땐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았지요. 뭐니 뭐니 해도 후보단일화 문제인데요, 어르신 생각에는 어느 분이...”

“당연히 김영삼이가 됐어야지. 뭐 말이라꼬 물어보나.”

그러시겠죠.

“이유는 뭔가요? 역시 김대중은 빨갱이라서?”

“그렇지. 그것도 있고... 또 뭐나 하모 말이다....”

선생의 눈매와 입가에 얼근히 취기가 오른 것 같다.

“전라도 하와이놈들은 원래가 그렇지마는 서도... 꼭 그래 뒤통수를 친다카이. 절대로 그놈들을 믿어가꼬는 안돼요.”


그렇지... 이게 있었지.

이런 문제를 접할 때, 해묵은 ‘반공’, ‘빨갱이’와 함께 항상 만나게 되는 ‘지역감정’, ‘전라도 하와이’.

대체 이 얘기는 언제부터 나온 것일까.

사회전반을 살피기에 앞서, 정치판에서 ‘지역주의’란 말은 뭐 기초상식에 가깝다.

이번 총선, 저번 대선만이 아니라, 지역별 득표현황도에서 동서로 쫙 갈라진 지도를 본 지는 꽤 오래되지 않았던가.


<남북한, 아니 동서남한...>


이러한 지역주의, 지역감정에 대한 유래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어왔다.


야권의 걸출한 두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스스로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별 것 아니었던, 그저 애향심이나 향토에 대한 자부심 정도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촉발, 확대, 과장시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보다 더 먼저, 1969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돌풍을 일으킨 김대중에게 밀려 자칫 낙선할 뻔 했던 박정희가, 선거 운동 기간 중, 그리고 당선 이후에 꾸준히 호남을 소외시키고 영남의 집결을 호소하며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켰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가 하면, 1959년의 이른 바 ‘하와이 필화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전라도 하와이 論’은 당시에도 사회전반에 만연했던 인식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더 올라가면 ‘한국전쟁 당시, 호남지역의 낮은 참전율과, 압도적으로 높은 영남지역의 참전율 탓에, 영남 인사는 중용되고 호남 인사는 소외되어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말 같잖은 소리도 있었다.


이것 참,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더 말이 안 되긴 한데 ㅋㅋ, 조선시대 호남지방이 유배지로 많이 사용되었던 지라(이것도 사실여부가 불투명) 그때 한을 품었던 그 후손들에 의해 기인되었다는 해괴한 소리도 들었다.


뭐 더 위로 올라가서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호남사람을 쓰지 말라고 말을 했다는 개드립에 이르면 자못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런데, 의외로 이 말을 믿는 사람은 꽤 많다. 벌써 우리 보수선생만 해도 그렇다.


“이 지역감정이네 뭐네 해도요, 문제는 일단 전라도 놈들이 교활하고 배신을 잘해서 그런기라요. 이기 일 이십년 된 얘기가 아이고, 저~기 고려 왕건이 때부터 그랬다 안 하드나.”


글쎄, 과연 그럴까. 아니,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하나 싶다.

우선 그 ‘훈요십조’라는 것부터 보도록 하자. 훈요 십조(訓要十條)는 《고려사》에 수록된, 고려 태조가 후손에게 남겼다는 열 가지 가르침이다. 태조 26년 943년 4월 태조가 박술희를 내전(內殿)으로 불러 전해 주었다고 알려졌다. 신서십조(信書十條) 또는 십훈(十訓)이라고도 하며, 《고려사》(권2, 세가2)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1. 불교를 숭상하고, 사원의 폐단을 엄단하라.

2. 사원을 함부로 짓지 말라.

3. 장자가 왕위 계승을 하되, 어질지 못하면, 신망 있는 자에게 정통을 잇게 하라.

4. 고려의 특성에 맞게 예약을 발전시켜라.

5. 지맥의 근본인 서경을 중시하여, 서경에서 1년에 100일간 머물라.

6. 연등(燃燈)과 팔관(八關) 등을 소홀히 하지 말라.

7.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라.

8. 차령 이남 금강 밖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역모의 기상을 품고 있으니 결코 그 지역 사람을 중히 쓰지 말라.

9. 백관의 녹봉을 제도에 따라 마련했으니, 함부로 증감하지 말라.

10. 경전과 역사를 널리 읽어 온고지신의 교훈으로 삼아라.



<내가 그랬나?>


이 열 개 조문 자체가 고려 현종조의 위작(僞作), 즉 쌩 구라라는 말도 제쳐두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하나마나한 뻔한 소리인 몇 개 조문을 건너뛰어, 호남 홀대의 역사적 근거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8조일 것이다. 고려 왕조 성립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라이벌이었던, 견훤의 후백제에게 평생 하도 시달리다 보니 지긋지긋해져서 저런 말을 했다는 그럴 듯한 해석도 있는데, 그것마저 사실과는 좀 다르다.


첫째, 왕건이 백제인을 미워했다는 증거가 없다. 왕건을 괴롭힌 세력은 백제 세력 가운데 호남 세력이 아니라 오늘날의 청주 일대의 호족 세력이었다. 왕건의 상당수 측근들은 호남 출신이었다. 예를 들어 훈요십조의 다른 항목에서 숭앙의 대상이 되었던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 사람이며, 이 고장에서 또한 최지몽이 출생했으며, 일찌감치 정윤이 되었던 혜종의 외가, 곧 장화왕후의 본가 역시 나주였고,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 승주 태생의 순천 박씨로 견훤의 외손녀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역시 전남 곡성 용산재 출신이다. 결정적으로 훈요십조를 전해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 사람이었는데, 옛백제 사람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옛백제 출신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 없다. 왕건은 생전에 '나주의 40여 개 군은 나의 울타리와 같은 곳으로써 나를 잘 따랐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나주일대의 해당지역은 왕건이 고려의 건국 이전에 수군으로 정복한지역이다.


둘째, 승주 출신의 박영규, 남원 출신의 현소, 나주출신의 윤다라, 아주 수국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김심엄, 광산출신의 김길 등 호남출신 사람들이 계속해서 등용이 됐기 때문에 결국 후왕들에 의해서도 훈요십조는 지켜지지 않았다.


셋째, 풍수지리에 따라 따져 보면 호남은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차현(車峴) 이남 공주(公州)강 바깥”은 경주에 대한 배산역수이지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는 아니며, 오히려 낙동강을 낀 경주 지역이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라는 주장도 있다. 뒷날 성호 이익은 금강이 반궁수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는데, 이에 대해 한강의 범위가 훨씬 더 넓고 가깝기 때문에 멀리 있는 공주강을 거론함을 옳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


이렇듯, 되도 안한 ‘고려 왕건 훈요십조 호남 홀대론’은 이제 좀 안 봤으면 좋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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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이 그야말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그럼에도 그에 대해 정부가 허위와 독선을 일삼자, 민심은 드디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정부에 대해 ‘참다 참다 못한’ 사람들이 움직인 것이다. 그때가 되어, 전두환 정권은 정신을 차렸을까. 글쎄,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연일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고, 또 그에 대해 폭력적인 진압이 자행되던 중,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국민들이 끊임없이 요구해 온,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내 나라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대통령은 직접선거제가 아니라 간접선거제였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의 핵심 중 하나인 대통령 간선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라는, 이름만 거창한 허수아비들이 우루루 장충체육관에 모여, 하나마나한 투표로 형식적인 대통령 선출을 하는 그런 제도였다.

 

 뭐? 미국도 대의원을 통한 간접선거제로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느냐고?

 한국에는 ‘한국식 민주주의’를 적용시켜야 한다고?

 글쎄, 아래 투표 결과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1972년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

1978년  7월  6일: 제9대 대통령 박정희 선출

                           (투표 2,578명, 찬성 2,577표, 무효 1표)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선출

                          (투표 2,549명, 찬성 2,465표, 무효 84표)

1980년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선출

                          (투표 2,525명, 찬성 2,524표, 무효 1표)

 

 어떤가? 기가 막히지 않은가? ‘100% 투표 - 100% 찬성’이라는 북녘의 그것과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해 주는 역할을 맡은 뒤, 이듬해 제5공화국 헌법 발효와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체되었지만, 5공 헌법 하에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전두환과 민정당은 차기 대통령도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뽑을 생각이었다. 4·13 호헌조치는, 이러한 5공헌법을 고수할 터이니, 괜히 대통령 직선제 같은 소리 하지 마라는 거였다.

 

 당연히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튿날인 14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사들이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한층 더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은, 5월 18일, 그래도 설마설마 하던 박종철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 은폐되었음이 폭로되고, 급기야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던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자, (7월 5일 사망) 그야말로 ‘뚜껑이 열려 버렸다’.

 

 “아니 그런데, 최루탄은 가스로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물건 아닌가요? 그걸 맞고 죽을 수도 있나?”

 우리 중 가장 어린 멤버가 물었다.

 “본데는(본래는) 그렇지. 본데 하늘로 보고 쏴가꼬 터주는 기라요. 그란데 뭐 경찰이 다급해가 그랬는지, 아이모 용심이 나가꼬 ‘그래 함 죽어봐라’ 하고 쐈는지는 몰라도 간혹 사람을 보고 바로 쏘는 경우도 있었다케. 거, 와, 4·19 때도 고등학생 하나가 그래가 안 죽었나. 이때 그 연세대 학생도 비슷한 일이 생긴 기 아일까 싶다. 내사 안 봐서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이 영감님이 ‘보수선생’이 아니라 ‘진보선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그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나라, 이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지만, 방법이 다르고 시각이 조금 다른 것 뿐이지 않을까.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부산에서도 데모하다가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 황보영국이라는 이름이었나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출처 : 민주노총 열사추모 홈페이지>

 황보영국.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은 많이들 알지만, 이 청년의 이름은 귀에 설다.

 당시 26세의 노동자였던 그는,  2월 7일 박종철 추도집회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경찰에 잡혀 영도경찰서로 이송됐다. 난생 처음 경찰에 잡힌 영국은 1주일 가량을 영도경찰서, 남부경찰서 등을 돌며 경찰의 가혹한 억압을 경험하게 됐다. 그 체험이 그를 6월 항쟁의 전면에 서게 만들었다. 경찰의 욕설과 반인권적인 처우도 못 마땅했지만, 무엇보다 영국이 참을 수 없는 건 TV뉴스였다. 화면에선 김만철 일가의 망명 소식만 보도됐다. 당시 전국은 박종철 열사 추도 분위기로 시끄러운 때였다. 분노한 영국은 유치장에서도 자살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폭력정권을 몰아내겠다고 했단다.

 

 청년은 결국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석달 뒤인 5월 17일 오후 4시 47분. 부산 부산진구 부전2동 옛 부산상고 앞, 그러니까 지금의 서면 롯데백화점 앞 복개천 도로에서 영국은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자신의 몸에 라이터로 불을 댕겼다. 영국은 쓰러질 때까지 '민주쟁취,독재타도'를 외쳤다. 인근 주변 식당의 주인과 아주머니들이 세숫대야로 물을 뿌려 불을 끄려 했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백병원으로 실려 가면서도 외쳤고,침상에 누워서도 소리쳤다. 그는 8일 후 5월 25일 새벽 5시에 숨졌다. 정의감에 불타던, 피끓는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안타까운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영국이 죽자 경찰관 서너 명이 병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우리(경찰) 얼굴을 봐서 시킨대로 해달라고 말했다.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강압적인 분위기 탓에 영국의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찰은 영국을 화장해서, 유골을 묻지 말고, 뿌리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아침 영국의 유골은 당감동 화장터에서 소각돼 사라졌다. 임종과 장례는 불과 하루 만에 끝났다.

 

 경찰의 통제가 심하다 보니 영국의 죽음은 언론이나 재야단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또 유족들도 자식이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없다며 나서길 꺼렸다. 영국 말고도 남은 4명의 자식을 봐서 남들이 모르는 게 좋겠다 싶어 가족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렸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사인 규명도 안 됐고, 추모할 만한 사진이나 기록도 거의 남은 게 없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모두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보수선생이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러고 보이 들은 것도 같고... 신문에서 봤나 싶기도 한데... 그런데 그거 말고도 또 있었을 끼다. 내가 들은 얘기는, 누가 데모하다가 최루탄 때문에 우째되가 어디 높은 데서 떨어지가 죽었다 카는 소리를 들었어."

 

 선생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태춘일 것이다.

 항쟁이 한창이던 6월 18일 좌천동 시위는 부산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서면 시위대가 범일 고가대로에서 경찰의 저지선에 막히자 시위대는 촛불을, 경찰 진압대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이태춘은 경찰이 쏜 최루탄을 온몸에 뒤집어 쓴채 범일 고가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이후, 봉생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으나 엿새 만에 사망했다. 또 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안타깝게 죽었다. 

 

<6월 27일 이태춘의 장례미사 후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노무현. 그 왼쪽은 문재인>

 "멀건 사람을 뚜디리 패고, 잡아옇고, 고문을 하고, 엉? 쥑이고.. 이라이 사람들도 눈이 히떡 디비짔어. 멫날 메칠로 데모로 했다꼬. 언제는 비가 억수같이 왔는데도 그 비로 맞고 했다카이. 사람들이 집에도 안 가. 시청앞이며 중앙동이며 국제시장, 미문화원 앞, 부산역, 서면... 뭐 하이튼 사람들이 꽉 찼다꼬. 경찰 병력이 자꼬 늘었다카지만서도 이거는 뭐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이라. 우째 해 볼 수가 없었을끼야." 

 선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6월 10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항쟁은 점점 그 참여가 늘어나, 26일에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을 때에는 그 수가 세배 이상 늘어났다. 6만명의 경찰병력을 투입해 진압하려 했으나, 노도와 같은 사람들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운이 다했음이 분명한 군사정권은 최후의 발악으로, 마지막 카드인 군 병력 투입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18일 밤 부산 사태를 본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고명승에게 군 출동 준비령을 하달했다. 지역 사단으로 안되면 전방의 부대라도 빼라는 것이었다.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철도청에 군 수송 협조를 요청했고 이종구 2군 사령관도 부산과 마산에 출동할 채비를 마친다. 2010년 공개된「작전명령 제 87-4호」(군사2급비밀) 제하의 비밀 문건에 따르면 11군단장을 부산·경남 지구, 9군단장을 충남북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이미 사실상 계엄 체제에 돌입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진행되었다면, 87년의 부산은 80년의 광주와 같은 일을 겪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하지만 천만다행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결정적인 것은 미국정부의 의중이었다고 한다. 당시 주한 미대사 릴리는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여, 작금의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한편, 무력진압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했고, 국내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고립될 것을 두려워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계엄령을 포기한다. 

 

 마침내, 6월 29일, 집권여당인 민정당의 대표이자, 차기 대통령 후보이고, 전두환의 오랜 친구인 노태우가 사실상의 항복선언인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1988년 2월 평화적 정권이양

2.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3.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관련사범들의 석방

4. 인간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5. 자유언론의 창달

6.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7.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6·29 선언은 6월 항쟁의 결과 시민들의 직선제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끊임없는 불신과 저항으로 궁지에 몰린 집권여당의 대표가 발표한 이 선언으로 인해 헌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제9차 개정헌법이 발의되었다. 제9차 개정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총 유권자의 78.2%(!!!)에 해당하는 20,038,672명이 국민 투표에 참여하고 이 중 93.1%가 찬성하여 수립되었다. 제9차 개정헌법은 형식적으로는 헌법의 개정 절차를 따랐으나 실질적으로는 입헌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을 변경하는 등 헌법의 제정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그때 참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술집이고 식당이고 사람들이 기분이 좋와가꼬 '오늘 하루 꽁짜!' 카는 집들이 많았다꼬. 대~단했지. 참말로."

웃으며 그때 일을 얘기하는 보수선생의 말을 들으니 우리도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시민, 국민, 민중... 아무튼 뭐라 불러도 좋을, 사람들의 승리. 과연 그 기쁨은 얼마나 오래갔을까.

동화책처럼 '그 뒤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지게 됐지만, 정통 민주세력이자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을 일으키면서 독자 출마를 강행하게 되었다.

 

결국 6월 항쟁의 중심 역할을 했던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면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엉뚱하게도 어부지리격으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참으로 죽쒀서 개준 꼴이 아닐 수 없었다.

 

<후보단일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때 김영삼이하고 김대중이가 합작을 몬해가 노태우가 안 됐나. 밥상 다 차리주이끼네 서로 묵을라꼬 싸우다가 밥상 디비뿐기라. 쪼다같은 새끼들."

보수선생의 어조와 눈빛에서 실망과 경멸이 느껴졌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때가 가장 보수선생 답지 않았고, 우리와 큰 폭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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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저녁 때가 되었다.

“어르신, 시장하시지 않으십니까? 저녁이나 같이 하시지요.”
“응? 뭐... 내는 괘안타(괜찮다)... 와? 고만 할라꼬?”
“아뇨,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으니 식사라도 하시면서 하시지요.”
“음... 저녁이라...”

왜 고민을 하실까?

“일어나시죠.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요 앞에 자갈치 회센터에 누님 가게가 있어요.”
“뭐.. 그라믄.. 가 볼까..”

선생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카페에서 큰 길 하나를 건너면 바로 자갈치였다.

듬성한 행렬 중간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선생의 뒷모습을 본다.

등은 약간 굽었지만 아직 꼿꼿한 자세다.

날이 저물고 이제 제법 혼잡해진 지하도 계단을 걸어 내려가던 선생이 뒤를 돌아본다.

“이 봐라. 이기 문제라꼬. 도대체가 이래가 되겠나.”
“네? 뭐가... 말인가요?”
“사회의식이요, 이래가 안된다꼬요. 이기 말이지. 질서가 이래가 될 말이가.”
“... 아...”
“우측통행을 하라카믄 와 안 하노 말이다. 정부에서 시기모 시기는 대로(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말이재. 말로 안들으요.”

선생은 지금 지하도 안, 무정부상태의 도도한 흐름 속에 서 있었다.

“우측통행이 백분 더 과학적이고 안전하다케. 그런 거로 알아서 연구를 해가 딱 국민들보고 시기는 줄 모르고 말이다.”

그래요, 그런 좋은 걸 왜 지금까지 (무려 81년동안) 놔뒀을까요.

그보다, 그런 걸 꼭 지켜야 하는 건가요?

“일본 같으모 택도 없다. 오데 이런 기 있노.”

글쎄요 전 일본을 안 가 봐서.


보수선생은 지하상가를 걷다가 또 한 번 눈살을 모았다.

선생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기엔 또각또각 구두소리도 경쾌하게 걸어오는 아가씨 두엇이 있었다.

일찍 찾아온 더위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그녀들의 옷은 더 얇고, 더 짧아져 있었는데, 선생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것들이 대학생인지, 공장띠긴지, 술집여잔지...쯧쯧쯧...”

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짧은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편견과 오해가 들어 있는가.

“가스나들이 저래 다리며 가슴이며 훤~하이 다 드러내놓고 다니모 우짜자는 긴지...”
“고맙죠.”

개념없이 끼어든 누군가를 흘겨보았다. 다행히 선생은 듣지 못했다.

“저라이 성폭행이니 뭐이니 하는 일이 자꼬 생기는 기라.”

글쎄, 과연 그럴까요.

물론 여자들에게 단정한 옷차림을 요구하는 것이 그런 범죄를 줄일 수 있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더 중요하게 해야 할 것은 남자들에게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못 대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요.


계단을 올라와 길 건너편의 지상으로 나왔다. 선생은 두리번 두리번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중얼 하더니 뭔가를 찾는 눈치다.

“아하, 저기 롯데백화점이구나. 시청자리였는데 저기가 저래됐네. 그런데...”
“뭐 찾는 거라도 있으세요, 어르신?”
“어... 내가 지하철 꽁짜라꼬 천날만날 땅 밑으로만 댕기이끼네 요 위에는 오랜만에 와본다. 그런데 와 그기 안 보이노?”
“뭐 말씀이십니까?”
“아.. 요 어데 파출소가 하나 안 있었나?”
“남포파출소 말이군요. 지금은 없어지고 관광안내소가 들어섰습니다. 이 자립니다.”


남포파출소.

1987년 6월, 그 뜨거운 여름을 보냈던 사람들은, 그 건물이 그저 건물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리라. 80년대만 해도 이곳, 중구 남포동과 중앙동 일대야말로 '민주화 투쟁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당시엔 지금의 원도심이 부산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시청은 물론 미문화원까지 이 일대에 몰려 있어 시위지로서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때, 부산의 대학생들과 넥타이 부대들은 날마다 남포동 일대에 모였으며 이들은 다른 행정기관보다 경찰기관인 남포지구대를 주로 공격했다. 당시 시위는 지금보다 훨씬 격한 모습을 띠고 있어 매일 같이 남포지구대엔 돌과 화염병이 날아왔으며, 결국 6월 민주항쟁 중 남포지구대는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너무 과격한 것 아니었냐고? 글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고문을 한다거나,


'용의자' 도 아닌 '참고인'인 대학생을 고문해 죽이고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따위의 말을 한다거나,


실탄이나 다름없는, 아니 어쩌면 더 위험할 지도 모르는 최루탄을 시위대에 직격시켜 결국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내 누이, 내 동생, 내 친구에게 벌어진 일이라면?

그리고 곧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면, 그때도 저런 반응을 과격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뭐 아무튼 격렬한 시위로 파출소는 불타버렸다. 

그 뒤엔 어떻게 되었을까?


정부는 얼마 뒤 불에 타버린 남포파출소를 '토치카형'으로 새로 지어 저 윗사진에 나오는 대로의 모습을 갖췄다. 1개 파출소의 연면적만 220㎡. 지하1층에서 지상3층까지 빨간 벽돌로 두껍게 벽을 만들었고, 2~3층 창문의 크기는 얇고 길게 설계됐다. 중세시대 요새를 닮은 남포파출소는 시위대의 화염병과 돌멩이에도 끄떡없도록 만들어졌던 것이다. 


축성술에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수원성 공심돈을 설계한 정약용이 울고 갈 일이다. 시위대의 공격을 막겠다는 실용적인 의도도 있었겠지만, '절대 네놈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단호한(-_-;;;) 의지도 엿보인다.


그 덕분인지 새로 지어진 남포파출소는 그 후에도 격한 시위가 이어졌지만 웬만한 공격에는 흠집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5공 정부가 무너지고 시위도 줄어들자 남포파출소는 '군림하던 정부의 상징물'로 흉물처럼 자리를 지키게 됐다. 결국 2008년 2월, 경찰 역시 '봉사하는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던 이 요새를 폐쇄하게 됐다.


곳곳에 있는 역사와 시대를 옆으로 하고 식당에 들어와서, 소주 몇병과 생선회 몇접시를 앞에 놓고 젓가락을 들었다.

"어허이, 보래, 자네 젓가락 잡은 손 한번 보자."

그럴 줄 알았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보수선생은 일행 중, 유독 젓가락질이 서툰 한 사람을 콕 집어 불렀다.

"자네는 어느 나라 사람이고? 아니 멫살인데 젓가락을 그따구로..."

"... 너 밥상에 불만있냐?"

선생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누군가 이죽거렸다. 못 들은 것이 분명한 선생은 훈계를 계속했다.

"우리 아들은요, 젓가락질로 할 수 있을 때까지 방바닥에서 밥을 묵읐다. 조선사람이라카믄 젓가락질은 올키 해야 되는기라."

선생은 그 뒤에도, 요즘 회는 자연산이라 해도 전부 양식 같다느니, 요즘 소주는 순해서 소주도 아니라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한참 뒤에야, 나는 아까 남포파출소가 화제가 되었을 때 떠올랐던 질문을 보수선생에게 할 수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은 6월, 하면 어떤 날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6월은 6.25지."

그러시겠죠.

"그것 말고는요?"

"현충일."

초지일관.

"네, 물론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지요. 그런데, 아까 남포파출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87년 6월에는 민주항쟁이 아주 치열했지 않습니까? 어르신은 그때,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87년? 87년이면 언제고?"

"제5공화국, 그러니까 전두환 정권 말기입니다."

"아, 그라고 보이 6.29 선언 말인가베."

"예, 6.10 항쟁 얘깁니다."

한 사건을 놓고도 이렇게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우리는 그 뜨거웠던 여름의 시작, 불붙었던 그날을 떠올렸고,

선생은 항쟁의 끝, 저들의 항복선언(사실은 그것을 위장한 술책)이 있던 날을 떠올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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